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朝光)』 1937년 3월호에는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珍品蒐集家秘藏室歷訪記)'라는 제목의 특집기사가 게재되었다.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는 당시의 대표적인 고미술품 수집가 한상억⋅장택상⋅이병직⋅이한복⋅황오의 5인과 연희전문 상과(商科) '포스타'실에 대한 인터뷰 기사로서, 1930년대의 고미술품 수집방식과 수장가의 기호 등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조광』에 실린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게재하고자 한다. 장택상에 대한 내용은 이 연재의 9번째(2011. 1. 31)에 실린 바 있다.
한상억(韓相億: 1898-1949)은 남작 한창수의 서자로 독일과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1933년 10월에 한창수가 사망하고 이를 계승한 장남 한상기가 이듬해 6월에 한강에서 실족사하자 남작 작위를 계승받았다. 조선귀족 남작이 된 한상억은 1939년에 조직된 경성부 육군병 지원자 후원회 간사, 조선귀족들의 전쟁협력단체인 동요회(同耀會)에 발기인과 이사로 참여하였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랐다. 1930년대 당시 '조선 수집가 중에서 가장 좋은 그림과 가장 좋은 도자기를 가진' 수집가로 불릴 정도로 우수한 고미술품을 많이 수장하였다.
* 현대 문법으로 바꾼 부분이 있고, 한자는 대폭 줄였다.
『조광(朝光)』, 1937. 3월호, 표지 | 『조광』, 1937. 3월호, 목차 |
전언(前言)
신라, 고려, 이조를 통하여 도자, 서화, 불상 등 세계에 자랑할 혹은 만한 국보가 혹은 지하에 묻히고 혹은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혹은 항간(巷間)에 버림을 받아 고귀한 예술품이 일개의 니토(泥土)로 화(化)하게 된 오늘, 오히려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고대 조선의 공예품을 수집하는 이가 있음은 기쁜 일이다.
우리는 사계의 유지(有志)를 방문하고 그분들의 수집한 찬연한 예술품을 일반에게 소개하여 세계적 국보가 조선에도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바이다.
신선도의 풍치 아래서 고대예술에 도취된 한상억씨
조선 수집가 중에서 가장 좋은 그림과 가장 좋은 도자기를 가진 한상억(韓相億) 씨를 어느 날 밤 씨의 자택으로 찾게 되었다. 씨는 기자를 맞으며 다짜고짜로 “조선일보 어느 부에 계시오?”하고 쾌활히 물으신다. 기자도 어깨 바람을 내며 “출판부에 있습니다”하였더니 씨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렇소. 귀사 정치부에는 내 동창이 있지요. 뉴욕서 같이 공부한 한보용(韓普容)씨 말입니다.”하고 친절히 말씀하신다. 기자는 주인 영감이 미국 출신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잠깐 실내를 바라보았다. 한편에는 단원(檀園)의 신선취적도(神仙吹笛圖)가 있는데 신선이 고요히 내려와서 인간세상을 바라보고 피리를 부는 광경이다. 주인 한 씨는 미국 출신과는 정반대로 동양적 고전미에 취하여 신선도의 향운(香韻)아래서 몇 천년된 돌화로에 몇 천년된 돌 주전자로 차를 펄펄 끓이며 나무잔에 차를 부어 기자에게 권하시는 것이다. 기자는 지금의 자리를 망각하고 몇 천년 전 옛날로 돌아가서 어느 신선과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A기자,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 『조광』, 1937. 3월호, 28-29쪽.
“선생의 가진 그림 중에 어떤 것이 제일 진품(珍品)입니까?”하고 기자는 제일 문(問)을 발하였더니 옆에 있던 이한복(李漢福) 씨가 말끝을 채며 “이집 주인 영감은 너무 욕심이 많아서 한국고대미술품 중 좋다는 것이면 제일 먼저 뛰어가서 남보다 고가(高價)를 주고 사니까 여간한 사람은 도시 살 수가 없어요. 참 욕심장이시지…” 이때 옆에 있던 모씨가, “욕심도 그런 욕심은 좋아…”하고 말을 달자 이씨는 “하긴 그래 저 한 씨가 있기 때문에 조선에 좋다는 물건이 외국으로 좀 덜 빠지는 셈이니까…”하고 맞장구를 친다.
한씨는, “허허 나를 욕심쟁이로 몰고 또는 올렸다 내렸다하고 이건 어째야 좋소”하고 기자를 바라본다. 기자는 웃음으로 말 대답을 흐리고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때 한씨는, “그것이 현재(玄齋)의 금강산도(金剛山圖)이오. 꽤 진품이지요”하고 말을 끊자 옆에 있던 이씨가, “그 그림을 보시오. 몇 백년 된 그림인데 아직도 산 것 같지 않소?”하고 설명을 부가한다. 사실 그 그림을 바라보니 화도(畵道)에는 전혀 맹목인 기자의 눈에도 어쩐지 좋은 듯하였다.
심사정, <금강산도>, 한상억 소장, 조선명보전람회(1938) 출품.
기자는 명화라고 칭찬을 한 후에 다른 고물(古物)을 보기 원하였더니 주인 한 씨는 주섬주섬 벽장과 광에서 당대(當代) 진품을 꺼내 놓지 않는가? 제일로 ‘신라도금관음상(新羅鍍金觀音像)’이라는 불상은 조선의 대표적 불상으로 모양은 적으나 춘풍추우(春風秋雨) 천여 년이 지났건만 손과 발과 얼굴이 산 듯하고 선과 각이 또렷하여 실로 진귀한 진품이었다. 현재 가격은 일 이만원을 불하(不下)하리라 한다. 다음으로 ‘고염육각병(古染六角甁)’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우아하고 찬란한 모양은 얼른 보아 진품임에 틀림이 없다. 꽃을 그리고 가운데에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고 썼는데 아마 궁내(宮內)에서 나온 듯하다고 한다. 몇 만원을 주어도 구할 수 없는 귀물(貴物)이라하니 기자는 갑자기 정신이 황홀하였다. 그 다음으로 사 백년전 이조자기로써 ‘고염자기대화병(古染磁器大花甁)’이 있는데 얼마 전 전형필(全鎣弼) 씨가 사신 일만 오천원 짜리와 그리 손색이 없는 희귀품이라 한다. 기자는 속으로, “나 같은 사람은 저 화병 하나만 있어도 일생 먹고 살기엔 걱정이 없겠군”하고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였다. 그 다음 ‘조선백납병(朝鮮百衲甁)’으로 단원(檀園), 현재(玄齋) 등 조선 명화가의 그림을 망라한 병풍이 있는데 폭이 팔십일 폭이요 사십 일인의 그림을 붙여 놓았다. 이야말로 틀림없는 진품이다. 주인 한 씨는 어떤 이가 몇 만원을 주겠다는 것을 안 팔았지요“하고 토를 다신다. 그 다음으로 흑요석(黑曜石)같이 빛나는 소반과 정다산(丁茶山)의 글씨를 새긴 듯하다는 술잔과 기타 다람쥐 목공품과 연적 등을 구경하고 기자는 그 화려한 미술품에 그만 취하고 말았다.
<고화(古畵) 백납병(百納屛)>, 한상억 소장, 조선명보전람회(1938) 출품.
“어떻게 이런 진품을 모으셨습니까?”하고 탄성을 발하였더니 옆에 있는 모씨는,
“이 한 선생은 꼭 진품만 산답니다. 그래서 조선서 진품왕(珍品王)이지요”하고 방울을 단다.
“그래 이렇게 진품만 수집하시기에 얼마나 고심하셨습니까? 그리고 돈도 상당히 들었지요?”하였더니
“뭐 고심이야 많지요. 비오는 날 눈 오는 날이나 밤중이나 좋은 물건만 있다면 시각을 어기지 않고 쫓아다니지요. 그 세세한 것을 어떻게 말로 다 합니까?”하고 슬쩍 발을 빼신다. 기자는 반드시 고심담으로 일화 하나를 제공해 달라고 간청하였더니 이한복 씨가 한 씨를 대신하여,
“내가 한 씨의 사정을 잘 아니까요 대신 말하지요. 주인이 매일 연적 한 개 찻잔 한 개에 천원 이천 원하고 자꾸 사들이니까 안(부인)에서는 야단이지요. 그래서 한 씨는 천원이나 이천 원 준 물건이라도 십 원 이십 원 주고 사왔다고 속인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좀 입장이 어려우신 때가 많은가 봅니다.”
이때 한 씨는 빙긋이 웃으며,
“이러다가는 집안 험구(險口)가 나오겠구려. 더욱이 잡지에 나면 아내가 보고 싸움을 걸게…이거 좀 재미없어”하고 슬쩍 웃으신다.
일동은 모두 허허 한 바탕 웃은 후에 기자는 지금까지 수집에 사용한 돈을 물었더니,
“아마 돈 십 만원이나 되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잡지에 쓰진 마시오”하고 부탁하신다. 기자는 주인에게 사의를 표하고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