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의 경매회
‘경매(競賣)’의 사전적 정의는 “사려는 사람이 많을 경우, 그들을 서로 경쟁시켜, 가장 비싸게 사겠다는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일”로서 ‘박매(拍賣)’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미술품이 경매라는 과정을 거쳐 매매된 것은 아카오(赤尾)에 의해 “고려고도기(高麗古陶器)”가 경매된 1906년이다.
미술품이 경매회에 출품되었다는 사실은 미술품의 유통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함과 아울러 미술품의 성격이 개인의 애완물에서 ‘상품’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경매에 참여한 인사들이 미술관계자 또는 골동애호가들이고 경매물을 관람한 수효는 많지 않았을 것이나 일정한 장소에서 미술품을 상품으로서 공개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제 고미술품은 사랑방과 같은 폐쇄된 장소에서 친분 있는 인사들 간에 감상과 거래가 이루어지던 전근대적 관행에서 개방된 공공의 장소에서 일반의 품평과 감정의 대상이자 상품이 된 것이다.
아카오(赤尾)의 경매회 뒤에는 하야시 츄자부로(林仲三郞)가 메이지마치(明治町: 명동)에서 운영한 삼팔경매소(三八競賣所)가 있으나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미술경매라기 보다 여러 종류의 물건 매매가 이루어진 종합경매로 추정된다. 이 삼팔경매소는 후에 주식회사가 되었고 은행가 이케다 쵸베이(池田長兵衛)가 사장이 되어 수년간 유지되다가 1919년경에 해산하였다. 1915년에는 고미술상 사사키 쵸지(佐佐木兆治)에 의해 원금여관(原金旅館)에서 경매회가 열리다가 3, 4년 후 고미술상의 공동경매소를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 현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 옆에 있는 요정 적성(赤星)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경매회는 체계적인 조직이 없고 간헐적인 것이었고, 경매회 개최시 목록이나 도록 등을 발간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1942년 신축된 경성미술구락부 전경(京城府 南山町 二町目: 현재 서울 중구 남산동 2가 프린스호텔 자리)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9번 출구에서 바라 본 프린스 호텔
경성미술구락부의 설립
1906년에서 1920년대 초까지의 서울에서 개최된 경매회는 체계적 조직이나 기관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개 일회적 또는 간헐적 행사로 그쳤기 때문에 지속성이나 연계성 등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와 같은 문제점은 1922년의 경성미술구락부 창립과 함께 해소되었다. 경성미술구락부의 설립은 1910년대의 ‘고려청자광(高麗靑磁狂)시대’를 거치며 골동의 수가 급증하게 되자 유통의 체계화가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부 남산정(南山町) 이정목(二町目)에 신축된 경성미술구락부 사옥은 아담한 2층 벽돌건물로서 1층은 경매장, 2층은 일식으로 꾸며져 있었다고 전한다.(현 서울 중구 남산동 2가 프린스 호텔 자리) 경성미술구락부의 모체 또는 본보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동경미술구락부(東京美術俱樂部)가 1906년에 창립되었고 ,경성미술구락부 창업 20주년이 된 1942년 당시의 규모는 도쿄, 오사카, 교토, 나고야, 가나자와(金澤)에 이어 6번째였으며 당시 회관을 건립한 곳은 경성이 유일할 정도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일제시기의 혼마치(本町) 1정목 입구(일제시기의 사진엽서)
경성미술구락부가 위치한 남촌은 일제식민지 시기 서울의 대표적 일본인 거류지였다. 남촌은 '근대성'이 유입되는 곳이자 서울 도시화의 상징이었던 곳으로서, 흔히 혼마치(本町)로 불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혼마치는 해방 후 충무로가 되었고 메이지마치(明治町)는 명동이 되었지만 본정통(本町通, 혼마치토리)이라하면 현재의 충무로와 명동을 아우르는 지역을 의미한다. 본정통 곧 명동과 충무로는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서울의 상업과 유행의 중심지였다.
1904년 이후 일본인의 조선 이주가 급증하였고, 1915년 시점에서 서울 부자의 80%가 일본인이었음을 보면 일본인들의 진출 속도와 침탈의 양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일본 부자들의 미술품 수장과 유통을 돕기 위해 일본인들의 본거지인 남촌에 미술품유통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가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