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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 일제시기의 미술시장 (1): 유통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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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재부터는 일제시기를 중심으로 한 한국 근대의 미술시장의 개황을 살피고자 한다. 미술시장과 미술품 유통에 대한 접근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들의 윤곽과 수장가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 등을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미술품과 함께 요즘도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인 ‘골동(骨董)’은 “오래되어 드물고 귀한 각종 기물(器物: 古器)이나 서화 등의 고미술품”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대개 '고동(古董)'이라 불렸으며, 요즘에는 서화가 고동․골동 안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고동서화 또는 서화골동이라 하여 서화와 고동․골동은 나뉘어 사용되었다. 대체로 완상의 대상으로서 평가되던 고동서화는 근대에 들어서 골동이라는 단어로 불리게 됨과 함께 ‘상품’으로서의 질적 전환을 맞게 된다.


20세기 초 서울의 잡화점. 근대의 골동상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미술품 유통의 시작
우리나라에 있어서 고분 부장품 등의 골동을 매매하는 행위는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파악해도 무방할 듯싶다. 우리의 풍습은 어떤 무덤이라도 고의적으로 파헤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기 때문에 남의 무덤을 도굴하고 부장품을 매매하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굴 등을 통한 골동품 매매는 일부의 견해와 같이 1870년대부터로 보기도 한다. 당시 황해도 개성은 아직 개방되지 않았지만 잠입한 일본인에 의해 인삼이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골동품의 매매가 본격화된 시기는 대체로 청일전쟁(1894-95) 이후 일본인 이민이 증가하면서 부터로 생각된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19세기 후반부터 도굴⋅밀거래 등 음성적인 상거래를 통한 초보적 의미에서의 골동상이 등장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 시기를 도굴품을 중심으로 한 고미술품 거래의 초보적 의미에서의 시작기로 명명할 수 있을 듯하다. 19세기 후반을 고미술품 거래의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시작기라고 부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시작기는 1900년대 이후이다. 1900년대 이후의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거래와 유통은 대략 10년 단위의 주기로 변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① 골동거래의 시작기 (1900-10)
  ② 고려청자광(高麗靑磁狂)시대 (1910-20)
  ③ 대난굴(大亂掘)시대 (1920-30)

이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고려청자를 염두에 둔 일본인들이 개성을 중심으로 도굴을 시작하다가 점차 관심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도굴의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인 1904-05년에는 개성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고분 도굴이 극심하였다. 특히 1906년 3월 초대 통감(統監)에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고려청자 수집에 진력하여 일설에는 1,000여 점이 넘는 고려청자를 수집하여, 일부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고려청자 최고의 장물아비"라 부르기도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개성에 다녀오는 기차에는 수 십 개의 트렁크에 미처 흙이 제거되지 않은 도자기가 무수히 들어 있었다는 증언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10년대 들어 일제의 도굴은 개성지역을 벗어나 경북 선산(善山) 등 낙동강 유역까지 범위를 넓혔다. 특히 1911-12년(혹은 13년)은 고려자기 수집열이 최고조로 올라 당시 도굴⋅매매로 생활하는 자가 수백인 이상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시작된 고려청자에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른바 ‘고려청자광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고려청자 최고의 장물아비"라 불리기도 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정리하자면 조선 말기 국운이 쇠락하던 시절 일본인 묘적배(墓賊輩)들이 고려분묘를 무차별 도굴하고 부장품 도자기를 약탈해 간 것이 우리나라 근대 문화재 거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이 발굴(도굴)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직접적인 하수인은 내내 조선인이었다"고 당시 도굴범의 재판을 담당한 일본인 판사의 술회는 당시 조선에서 자행된 분묘 도굴의 실상을 윤색된 형태로 나마 엿보게 해준다. 일본인 도굴배들이 수백 수천의 조선인을 앞세워 '묵직한 막대기와 길고 날카로운 쇠꼬챙이(heavy sticks and long pointed iron rods)'를 들고 전국의 분묘를 찌르고 다닌 소행으로 인하여, "(도굴배들이 함부로 남행한 거친 방법 때문에) 아름다운 고려청자가 흔히 훼손을 입었다"는 영국의 도자기 연구자 곰퍼츠(Gompertz)의 증언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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