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개요
이른바 '안견논쟁'으로 불리는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문화재수집가 이 모씨는 자신의 소유인 <청산백운도>를 안견의 진작으로 주장하였지만, 당시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 재직 중이던 안휘준 교수는 진품이 아닌 것으로 감정하였다. 안휘준 교수는 당시 이 그림을 보고서 첫째 <몽유도원도>에서 볼 수 있는 필치와 전혀 다르고, 고사의 인물 묘사와 그림 구성이 중국 그림이 분명하다. 둘째 화제⋅서명의 글씨가 극도로 치졸하여 <몽유도원도>의 격조 있는 서명과 비교할 수 없다. 셋째 화제 글씨와 낙관이 회견(繪絹)의 상처 위에 덧씌워져 후대에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 이상의 이유로 이 그림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화가 가운데 하나인 안견의 그림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고사환금도> 오른쪽 상단 부분. 어떤 흔적도 없다.
<청산백운도> 오른쪽 상단 부분. “靑山峩峩 白雲悠悠”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靑山峩峩 白雲悠悠” 글씨와 인장 부분.
이에 이 모씨 등은, 첫째 도연명의 고사를 소재로 한 인물도이며 500여 년의 세월이 충분히 느껴지는 남송풍의 작품이다. 둘째 그림 우측 상단의 “靑山峩峩 白雲悠悠”라는 화제는 조선 초기의 고졸한 글씨가 틀림없으며, “朱耕”이란 호는 안견의 별호로 <몽유도원도>의 서명 글씨와 같다. 셋째 “池谷 安氏” 등 여러 개의 인장도 매우 뛰어난 솜씨이며, 도저히 위조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안견의 진작이라고 강변하였다.
1994년 당시 이 모씨를 중심으로 한 고미술업계 일부의 사람들의 안휘준 교수에 대한 공격은 극에 달했다. 당시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안견 기념 특별전시회"의 부대행사로 개최된 특별강연회는 학계 인사, 고미술 종사자, 일반인들로 수백석의 자리는 넘쳐 복도와 연단 앞까지 인파가 가득한 자리에서 안휘준 교수는 <청산백운도>가 안견의 작품이 아닐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발표장은 마치 끓어오르는 가마솥과도 같았다. 여기저기서 고성과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던 험악한 분위기였음을 당시 강연회에 참석했던 필자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고미술업계와 학계의 입장이 다를 수 있음의 문제가 아니고 “내 물건은 진짜인데 네가 왜 가짜라고 하느냐”는 식의 전무후무한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은 한 작품에 대한 감정의 진위문제를 넘어 학계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안휘준 교수 개인에게도 씻어내기 힘든 모함이었다.
이건환⋅이양재 공저, 『안견-재조명』, 미술연감사, 1994. 6. | 「'안견신론'을 위하여」, 안견연구회, 1994. 7. |
이건환 저, 『진짜 가짜의 진실』, 이화문화출판사, 2001. |
세 책 모두 <청산백운도>가 안견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안휘준 선생의 설을 공격하는 자신들만의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던 와중에 논쟁을 잠재울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조선 왕실을 담당하던 조선총독부의 관청인 이왕직(李王職) 차관을 지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가 돌아간 후 1년 만에 소장품들이 경매회에 나오게 되었다. 1936년 10월에 경매회가 개최될 때에 경성미술구락부에서는 『고소궁선생유애품서화골동목록(故小宮先生遺愛品書畵骨董目錄)』을 간행하였는데, 이 목록의 제일 앞쪽 도판으로 원나라 서화가로 유명한 조맹부(趙孟頫)의 <고사환금(高士喚琴)>이 실려 있다. <고사환금>의 우측 상단에는 아무런 글씨나 인장이 없다.
조맹부의 <고사환금>이 안견의 <청산백운도>가 된 것은 화면 우측 상단에 있는 글씨와 인장 때문이다. 1936년까지는 조맹부의 <고사환금>이었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靑山峩峩 白雲悠悠”, 안견의 자(字)인 "朱耕"이라는 글씨와 “池谷 安氏” 등의 인장이 추가된 후 안견의 <청산백운도>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른바 <청산백운도>를 안견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근거가 글씨와 인장인데, 『고소궁선생유애품서화골동목록』의 도판사진으로 인하여 글씨와 인장 모두 20세기 그것도 1936년 이후에 추가되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되었다. 중국 그림에 글씨와 인장을 첨가하여 조선 초기의 대화가 안견의 작품으로 둔갑시키려 한 것인데, 조작되기 이전의 사진이 나오게 되어 안견의 작품으로 강변하는 이들의 논리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 것이다.
「고화 2점 안견그림 진위논쟁」, 『한국일보』, 1994. 7. 6. |
「국내에 안견진품 없다」, 『문화일보』, 1994. 7. 15. |
경매된 서화
1930-40년대 당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간행한 경매도록의 그림과 글씨를 모아 분류하고 그 의의를 살핀 김상엽⋅황정수 편저, 『경매된 서화: 일제시대 경매도록 수록의 고서화』(시공아트, 2005. 9)가 출간될 때 <고사환금>은 중국 그림에 해당하는 284쪽에 실렸다. 황정수 선생은 『경매된 서화』에 게재한 「미술품의 전승과 기록에 관한 소론」에서 <청산백운도>가 안견의 작품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입증하였다.
『경매된 서화』 출간 이후 이 모씨 등은 "그림의 크기가 차이가 난다", "똑같은 그림이 두 장"이라는 등의 주장을 했지만 이미 ‘게임이 끝난’ 상황이었다. 일제시기에는 그림의 크기를 잴 경우 표구비단까지 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림크기의 약간의 차이는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었고, 똑같은 그림이 두 개라는 것은 더욱 논리가 성립되지 않았다. 결국 이 모씨 등은 학자적 양심에 따라 정확히 감정한 안휘준 교수를 모함한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꼬박 10년도 넘어서 안휘준 교수의 명예가 회복된 셈이다. 이 모씨 등이 아직도 승복하지 않고 있음은 물론이다.
김상엽⋅황정수 편저, 『경매된 서화』, 시공아트, 2005. 9.
일제시대 경매도록류를 자료화하기 위한 작업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안견 논쟁’을 끝맺음하게 되었다. 자료를 발굴하고 자료화하는 일은 이렇게 중요하다. 새로운 자료가 우리 인식의 폭과 깊이를 얼마나 확장시키고 심화시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 상황은 때론 급박할 때도 있었고 때론 위태로운 적도 있었다. 이 모씨 등은 여러 경로로 자신들의 입장을 항변(?)하기도 했고, 『경매된 서화』를 반박하는 책을 ‘곧’ 출간하여 논쟁을 다시 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반박하는 책이 출간되기를 기대했지만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요즘도 『경매된 서화』를 보면 열심히 뛰던 젊은 날(?)의 초상을 보는 것도 같아 흐뭇해지기도 한다. 옛날 얘기 좋아하면 나이든 증거라고 하던데 벌써 그렇게 되었나 보다. 妄言多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