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수집한 막대한 양의 고미술품을 1940년과 1941년의 두 차례의 경매회에서 '처분'해 버린 박창훈에 대한 주변의 평은 탐탁지 않았다. 오봉빈은 "박씨는 의업(醫業)으로 성공자 중 일인(一人)이니 물적 고통이 만무할 것이다. 그러면 그 - 진의가 어디 있는가. 우리 지인은 매우 궁금하였고 속으로 박씨를 책(責)하기도 하였다"하여 당시 수장가들의 평을 전하였다. 이에 대하여 박창훈은 자신의 수장품을 모두 경매회에 내놓은 이유를 "…슬하에 칠팔남매…자녀교육비를 적립하여야 부모의 책임을 다하겠다…" 그리고 “옛날에 복불쌍전(福不雙全)이라 하였으니 자신이 선대에 못 가졌던 이와 같이 복을 다점(多占)하였으니 중요미술품까지 점유하고 있을 염치가 없으니 이것만은 동호유지(同好有志) 제행(諸行)에게 분양하노라”라 하였다. 그렇지만 교육비 부담과 "복을 다점하였기에 염치가 없어…분양하노라"는 그의 해명에 동의하기 어렵다. 박창훈은 성공한 의사이자 당대의 명사로서 이재에도 밝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교육비로 인한 경제적 문제 운운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으며 "복을 다점하였기에 염치가 없어…분양하노라"는 말 역시 애장가로서는 할 수 있는 겸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내박창훈박사소장품매립목록(府內朴昌薰博士所藏品賣立目錄)』, '목록' 부분, 경성미술구락부, 1940.
『부내박창훈박사서화골동애잔품매립목록(府內朴昌薰博士書畵骨董愛殘品賣立目錄)』,
'회화' 부분, 경성미술구락부, 1941.
박창훈이 자신의 수장품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처분한 것은 그의 해명보다 당시 세계정세의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읽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박창훈은 1939년 6월에 국민당군이 중국공산당 신4군을 공격한 평강사건(平江事件)이 일어나고 7월에 일본이 국민징용령을 공포했으며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로 진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등 세계가 점차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가는 상황에서 위기를 직감하여 고미술품을 처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재기발랄하고 판단이 빠르며 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굳은 의지를 가진 인간형이었던 박창훈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고미술품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힘들 것이라 전망하고 고미술품을 모두 내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박창훈은 1951년 4월 5일 부산 피란 중에 향년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1930년대라는 시대
일제시기 한국의 미술시장은 서울, 평양, 대구의 세 곳이 꼽힌다. 이 세 도시는 일본인 유력자 등 수집가들이 많이 살고 거래도 활발하여 전국 고미술품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서울은 고미술품 거래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서울의 호사가와 수장가들의 구매력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아 다른 지역의 유물도 서울로 모여 들었다. 예를 들어 1920년대에 평양의 낙랑고분군이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발굴하자 도굴이 극심해졌는데 그 물건들이 주로 거래된 곳이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던 것은, 서울의 수집가들은 평양보다 2-3배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사주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1930년대 들어서 서울의 미술시장은 상품화가 보다 활발히 진행되고 시장이 저변화 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서울의 미술시장이 활성화된 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의 만주특수로 인하여 서울이 근대적 상업도시로 변화됨에 따라 백화점 화랑의 출현으로 인한 작품 유통의 활성화, 이왕가박물관과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수집 중심에서 전시와 선전 활동으로의 방향 선회 등을 꼽기도 하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30년대가 '황금광시대'로 요약되는 시기로서 고미술품 거래에 있어서도 손꼽히는 호황기였던 것이 더욱 큰 요인이다.
『부내박창훈박사서화골동애잔품매립목록』, '도자' 부분, 경성미술구락부, 1941.
1930년대 이후 미술시장의 활성화에 따라 점차 주요 수장가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한국 근대의 수장가들 가운데 박창훈은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수장가들이 대체로 귀족의 신분이거나 상속 등으로 이루어진 부자인 경우가 많은데 반하여 박창훈은 자수성가하여 당대의 명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점에 가장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체로 1930년대에 수집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의 수장품들은 수집 시기만으로도 시대성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박창훈이 수집한 방대한 고미술품이야말로 1930년대 당시 서울 고미술품 시장과 유통 상황의 직접적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미술품 수장가로서의 박창훈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박창훈이 일제시기를 대표하는 조선인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창 때에 수장품을 모두 처분해 버린 그의 고미술품 수장활동을 고미술품에 대한 애호심에 의한 것으로 평가하기에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모든 수장가들에게 민족의식이나 사명감 등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성공가도를 달리는 40대 초반의 저명인사가 ‘교육비’와 ‘염치’ 운운하며 방대한 수장품을 한꺼번에 처분했다는 사실은 대수장가로서의 처신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부내박창훈박사서화골동애잔품매립목록』, '가구' 부분, 경성미술구락부, 1941.
수장가의 조건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를 수장 방식에 따라 구분하자면 ① 전형필과 같이 수장하면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유형, ② 장택상⋅손재형과 같이 수장하였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조금씩 유출되다가 결국 모두 흩어진 유형, ③ 박창훈과 같이 대량 수집했다가 한꺼번에 모두 처분해 버린 유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박창훈은 고미술품 대수장가로서 명성을 떨쳤다가 모두 판매하여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였다. 이러한 행위의 가장 큰 원인은 수장가 개인의 확고한 의지나 목적의식이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전형필과 같이 민족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수장품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하루아침에 흩어질 수 있음을 박창훈의 예에서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박창훈은 고미술품 애호벽(愛好癖)을 승화시키지 못한 수장가 또는 수장품을 통해 이윤을 취하려 한 일종의 투자가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창훈의 방대한 고미술품 수집은 1930년대에 활성화되었던 서울 미술시장의 극명한 반영이라는 점에 일차적 의미가 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수장품 경매처분 과정은 우리나라 근대의 고미술품 유통사 가운데 수장과 산일(散逸)이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반면교사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