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훈은 여러 전람회에 자신의 수장품을 출품하였지만 그의 수장품의 전모를 개관할 수 있게 해준 것은 1940년과 1941년에 그의 수장품을 처분하기 위해 개최된 경매회이다. 1940년 4월 5일(금)에서 7일(일)까지 서울 南山町 京城美術俱樂部에서 개최된 경매회 당시 발간된 『府內朴昌薰博士所藏品賣立目錄』(국립중앙도서관 도서번호 위창 古 406-2-38)에는 총 274점의 고미술품이 목록으로 나와 있는데 끝부분에 "以下 數十点 省略"이라 된 것을 보면 대략 300여점 내외 또는 그 이상의 고미술품이 경매되었음을 알 수 있다.(도 1, 2, 3)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경매도록류에는 동일한 종류의 물건이면 하나의 번호 아래 그 개수를 표기하곤 하였다. 당시 간행된 경매도록의 번호는 대체로 정확한 개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종수(種數)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도판번호의 숫자보다 실제 출품된 작품 수효는 훨씬 많다고 보아야 한다.
『府內朴昌薰博士所藏品賣立目錄』. 25.5×18.2㎝, 京城美術俱樂部, 1940. 4월 간행.
『부내박창훈박사소장품매립목록』 속표지
『부내박창훈박사소장품매립목록』 목록 끝부분.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개최되었던 경매회에는 '찰원(札元)'이라 하여 경매회를 개최한 실무자와 고객을 대리하여 경매회에 참가하는 '세화인(世話人)'이 경매도록의 앞쪽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박창훈의 수장품을 경매한 1940년경부터는 경매도록에 세화인이 기록되지 않고 찰원 만이 기록된 것으로 보면 경매회의 시스템 또는 표기방식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박창훈 수장품 경매에 참여한 찰원은 "翰南書林 李淳璜, 吳鳳彬, 劉用植, 佐佐木聚古堂, 新保溫古堂, 天池茂太郞, 黑田 榮, 矢野忠一'이었다. 이순황은 간송 전형필의 서적류 구입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고 오봉빈은 화상, 유용식은 장택상 집에 출입하던 고미술업자이다. 佐佐木兆治는 경성미술구락부 사장을 지낸 인물로서 종로구 누상동에서 취고당을 경영하였고 온고당 주인 神保喜三은 전형필의 대리인으로 여러 경매회에서 전형필이 우리의 고미술품을 구입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天池茂太郞은 명동의 天池商會를 경영하였다. 黑田과 矢野 역시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고미술상들이다.
경성미술구락부 운영진(京城神社 祈願 참배 후 기념촬영, 1942)
앞 열 오른쪽부터 前田 監査役, 佐佐木 社長, 陳內 監査役, 永野 取締役
뒤 열 오른쪽부터 鈴木 取締役, 神保 常務, 松浦 支配人, 天池 取締役, 藤本 取締役
『부내박창훈박사소장품매립목록』의 1번에서 61번까지 서화, 62번부터 236번까지 도자, 금속, 가구 등의 작품, 237번부터 274번까지는 다시 서화가 순서대로 기록 되어있으며 127번까지는 사진이 있으나 128번 이후에는 사진 없이 목록만으로 되어있다. 목록에 기록된 종류별로 보면 도자기 125점, 서화 99점, 가구 및 목기류 17점, 금속 12점 나머지는 유리 등 기타 물건이다. 아래 [표]는 1940년에 개최된 박창훈 수장품 경매회에 출품된 서화목록이다. 이 글에서는 서화만을 대상으로 도표화하였다. 목록상으로 보면 서화작품은 99점이지만 ‘쌍폭’, ‘병풍’, ‘합장(合裝)’ 등이 여럿이기 때문에 실제 작품의 개수는 훨씬 많으며 서첩과 화첩류가 여러 점 눈에 띈다. 목록의 제일 앞쪽에는 중요한 작품들을 배열하였고 목록 편집상 편의를 위하여 축(軸)은 축끼리 권(卷)은 권끼리 배열되어있다. 다시 말해 이 목록의 편집은 연대나 화풍에 따른 분류와는 관계없이 제일 앞쪽의 작품은 중요도에 따랐고 그 뒤로는 도록 편집의 편의에 따른 배열이라 수 있다.
그리고 박창훈은 국적이나 시대, 화풍을 불문하고 다양한 작품을 수집하였기 때문에 그의 서화수집 취향이나 선호 관계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고미술품 거래가 활성화 되었던 1930년대에는 박창훈과 같이 재력이 있는 고미술품 애호가들은 여러 종류의 고미술품을 다량으로 수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후술하였지만 박창훈은 고미술품 수집을 일종의 ‘투자’로 생각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그의 수집에 일정한 취향 또는 경향이 있다기보다는 경제적 가치를 우선하여 판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그의 회화 수장품 가운데 조선 중기 이전의 것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의 취향 때문인지 아니면 이 시기에도 조선 중기 이전의 회화작품은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는지는 확단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그의 중국서화 수장품은 김정희와 교류한 중국인사 들의 것이 많아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한중 서화교류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1940년 4월에 개최된 박창훈 수장품 경매회에 출품된 서화목록표
* 경성미술구락부 간행, 『府內朴昌薰博士所藏品賣立目錄』(昭和 15, 1940)에 의거하여 작성하였다.
* '◎' 표시는 중국 또는 일본작가를 의미하고, 號는 이름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