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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의사 박창훈의 서화수장: 두 번의 전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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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훈은 한중일의 서화와 도자기는 물론 금동불, 가구, 목공예품 등에 이르는 다양한 고미술품을 소장하였다. 그의 주요 소장품 내역은 1940년과 1941년 두 번에 걸쳐 개최한 경매회 당시 발간된 경매도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1940년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박창훈이 28세 때인 1925년 일본 경도(京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섰다고 해도 1940년까지의 기간은 15년에 불과하다. 이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박창훈이 방대한 고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가 ‘황금광시대’로 요약되는 '골동품거래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1931년 시작된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인하여 '만주특수'가 일어났고 총독부가 추진한 산금정책(産金政策)에 따라 금광개발 열기가 불어 닥친 상황에서 고미술품 수집 열기는 고조되었고 경성미술구락부는 활성화되었다.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 『동아일보』, 1934. 6. 22. 2면

박창훈은 1934년에 개최된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朝鮮中國名作古書畵展覽會)'와 1938년에 개최된 조선명보전람회(朝鮮名寶展覽會) 등에 소장품을 출품하였다.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는 1934년 6월 22일부터 30일까지 9일간 동아일보사 주최로 동아일보사 3층에서 개최된 전람회로서 조선과 중국의 고서화가 270여점이나 전시되었다. 박창훈은 장택상, 이병직, 김찬영, 김은호, 함석태, 박창훈, 김영진, 김용진, 이한복 등 당대의 주요한 수장가들과 함께 출품을 하였는데 그가 출품한 작품 수는 모두 15인의 작품 19점이었다. 


1940년대 초 경성부청에서 태평로 대로를 바라 본 풍경.
조선명보전람회가 열렸던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과 조선일보 옛 사옥(현 코리아나 호텔 자리)의 모습도 보인다. 오른 편 건물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사옥이다.

조선명보전람회(이하 명보전)는 1938년 11월 8일에서 12일까지 오봉빈의 조선미술관 주최, 매일신보사 후원으로 경성부민관에서 개최된 대규모 서화전람회로서 박창훈은 10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다. 명보전은 당시까지 조선에서 개최된 민간주도의 고서화전람회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전람회였다. 명보전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회화명품이 다수 있음을 통해 명보전의 중요성과 권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이왕가미술관과 총독부박물관이 민간의 전시회에 소장품을 출품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출품작의 대부분을 도판으로 수록한 『조선명보전람회도록』은 일제시기에 발간된 고서화관계 전람회 도록 가운데 수록된 작품의 양과 질적인 면에서 여타의 도록과 비교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두 전람회에 출품한 박창훈의 출품작은 다음과 같다.


※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1934)와 조선명보전람회(1938)에 출품한 박창훈의 출품작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의 박창훈 출품 내역 부분, 『동아일보』, 1934. 6. 22. 6면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2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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