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훈의 외모는 일본사람으로 오해받을 정도였고 학창시절부터 '원숭이 상'으로 놀림을 받았으며 ‘몽키선생’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930년과 32년에 게재된 『별건곤』의 두 기사는 박창훈의 외모와 함께 조선후기의 화가 변상벽(卞相璧)의 그림을 애장하는 등 고미술품을 수집하였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박창훈 사진
의사 박창훈 씨가 진고개 일본사람 부락에서 살았으면 누구나 일본사람으로 볼 것이다.(언어, 외모, 행동 등이) 몽키선생의 의학박사 |
박창훈에 대한 인물평은 대체로 그가 대단히 의지가 강하고 재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민족주의 계열 잡지 『동광(東光)』의 박창훈에 대한 평은 "참으로 재기발랄한 사람"이자 "심(甚)한 사람"이었다. '심한 사람'이란 "한번 맘이 돌아서면 그대로 나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10년 결심'을 하고 '돈을 모아보겠다'는 초지는 기어이 관철되고야 말 것으로 믿으며", "군의 카라 뒤집어 댄 것으로 본다든지 뚫어진 와이셔츠를 입은 것으로 본다든지" 등의 내용으로 볼 때 그는 결심한 바를 끝까지 관철하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로서 재산증식에 집착하며 극히 검소한 생활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단히 친절한 사람이지만 그 친절이 부자와 고객만을 상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일종의 의구심으로 끝맺은 것을 보면 그의 성향이 서민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의학사가 정구충은 박창훈이 "재치가 있고 사교에 능하며 이미 2년을 관청에서 봉직하여 상봉하솔(上奉下率)에 능하였고…기억력이 좋았으며 고서화에 취미가 있어 사학과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회고하였다.
활발한 사회활동
박창훈은 여러 회사의 이사와 서울 약대, 서울 치대, 경기중학 등 여러 학교의 후원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였다. 대개의 의사들이 사회활동을 할 경우에 자신의 전공과 연결된 직종의 일을 한 데 비하여 그는 다양한 회사의 경영에 참여한 것이 눈에 띄는 내용이다. 특히 그의 나이 34세 때인 1931년에 일본의 대륙진출 이후 요구되던 군수품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설립된 국책회사인 조선피복공업회사의 취체역(取締役: 이사)을 지낸 것은 주의할 만하다. 조선피복공업회사는 "연 이십만 착(着)의 특수복"을 제조하는 회사로서 "반도 재계에 활보하던 제씨들로 중역스탑을 구성하여 시대의 물결에 거보를 움직이고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당시 주목받는 회사였다. 박창훈이 조선피복공업회사 등 여러 회사의 이사 또는 회장직을 역임한 것은 상황판단이 빠르고 이재(理財)에도 밝은 그의 성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예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성향은 그의 고미술품 수장과 처분에서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박창훈의 글씨와 수장인(朴昌薰家珍藏).
박창훈의 글씨 “人玩其華 己取該實”은 “겉으로 드러난 것 보다 그 바탕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재(理財)에도 밝은 당대의 명사 박창훈이 고미술품을 수장하게 된 계기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가 서울의 중인집안 출신인 것으로 볼 때 조선 중기 이후 성행한 고동서화(古董書畵) 수집열기가 근대기 서울의 여항문인(閭巷文人)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것을 직접 보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최근 발견된 자료에 오세창이 박창훈을 언급하며 '조카(賢侄)'라 한 구절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오세창과 인척관계인 박창훈이 자연스럽게 서화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재학 및 재직시 일본인 의학교수들이 고미술품을 모으던 모습에 자극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인 의학교수들은 불상, 분청사기, 벼루, 안경 등 우리나라의 고미술품을 수집하여 전통문화에 관심이 없던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일제시기의 중요한 수장가의 한 사람인 호남의 거부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을 중심으로 하여 1930년대에 활동한 친목단체인 구일회(九日會)에 각 지방 회원 50여명이 있는데 민규식, 최창학, 김용진, 이한복 등 일제시기의 주요 수장가들과 함께 박창훈이 참여한 것도 유의할 만하다. 이러한 사회활동을 통해 박창훈은 고미술품에 대한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회에는 박창훈의 수장품을 1934년과 1938년의 두 전람회와 1940년, 1941년의 경매회로 나누어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