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대표적인 미술품 수집주체는 이왕가박물관과 총독부박물관이었고, 개인으로는 총독부 고관이나 관료, 군인, 은행가, 사업가, 법률가, 학자, 교원 등이 주요 수집가였다. 고미술품 수장가 역시 일본인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였고 조선인 곧 한국인 수장가들은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정치적,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에 따른 귀결로서, 당시 일본인 수집가들은 한국인 수집가들을 주로 연적이나 필통 등 값나가지 않는 골동만 모으는 변변치 못한 고객이라는 의미에서 '수적(水滴)패'라고 무시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일제시기의 한국인 고미술품 수장가는 서울과 지방의 여러 인물들을 꼽을 수 있는데 1930년대 이후 점차 주요 수장가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일제시기 한국인 수장가로 구한말의 귀족이나 관료 가문 출신(민규식⋅이용문⋅장택상 등), 지역의 갑부와 자본가(박영철⋅임상종⋅손재형⋅최창학⋅전형필 등), 의사(함석태⋅박창훈⋅박병래 등), 학자나 문인(박종화⋅김양선 등), 미술가(오세창⋅김찬영⋅김용진 등)를 꼽을 수 있다.
「박창훈 씨 소장 서화골동 판매」,『동아일보』 1940. 4. 5.
성공한 의사, 손꼽히는 수장가
박창훈(朴昌薰: 1897-1951)은 1940년 4월에 자신의 수장품을 경매회에 내놓은 후, 이듬해인 1941년 11월에 다시 경매회를 개최하여 남은 고미술품을 처리하였다. 일제시기 조선 유일의 미술품 유통기관이었던 경성미술구락부는 주요 경매회 개최시 ‘경매도록’을 발간하였는데 박창훈의 수장품을 경매한 두 번의 경매회에는 모두 도록이 발간되어 그가 수장했던 고미술품의 내역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일제시기에 이루어진 경매회 가운데 한 수장가의 이름으로 2차례에 걸쳐 경매회가 개최된 경우는 박창훈과 이병직 두 사람 뿐이었다는 점과 한국 근대의 수장가들 가운데 박창훈처럼 자신의 수장품을 경매라는 공개된 방식을 통하여 모두 처분한 일은 없다는 점에서 박창훈 수장품 경매는 한국 미술시장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박창훈은 그가 수장한 고미술품의 방대한 수효와 높은 미적 수준에서는 물론 여타의 수장가들과는 완연히 다른 처리방식에서도 특별한 주목이 필요한 인물인 것이다.
두 번의 경매회에서 모두 600여점이 훌쩍 넘는 방대한 수량의 서화⋅도자⋅목공예품 등 고미술품을 처분한 박창훈은 일제시기 당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 명사이다. 일본 경도(京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창훈은 성공한 의사이자 사회명사 그리고 손꼽히는 고미술품 수장가로서 식민지시기에 세속적 의미에서의 성공을 모두 이룬 인물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박창훈의 신분과 가계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의학사 연구자 정구충이 그의 맏형 종훈(宗薰)이 관립일본어학교의 교관을 지냈다고 한 것을 보면 대체로 중인으로 추정된다. 박창훈에게 형이 있었다는 정구충의 기록은 박창훈이 여러 글에서 자신이 8대독자 더구나 유복자라고 한 것과 상충된다. 그러나 정구충은 종훈이 조졸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종훈이 요절한 뒤 박창훈이 유복자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비상한 천재
박창훈은 소학교시절부터 재능이 탁월하여 그를 가르친 선생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수하동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성고등학교를 역시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한성고등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 때문에 응시한 판임관 시험에서 다시 "첫째로 입격(入格)"하였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1918년에 졸업하였다. 1920년에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경도제국대학에서 연구를 하였고 1924년부터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조교수로 근무하였으며 1925년 경도제국대학에서 『본양봉와직염(本樣蜂窠織炎)에 취(就)하야』라는 논문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전공은 내장외과(內臟外科)였으나 전공으로 표방한 것은 항문외과(肛門外科) 곧 치질 전공이었다. 1932년에 한성의사회 부회장, 1933년에는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박 씨의 박사논문 경대교수회를 통과」,『동아일보』 1925. 2. 18.
경도제국대학에 제출한 논문 만장일치로 교수회의를 통과해
학위사령(學位辭令)은 약 일 개월 후?
"은사의 덕분 돈이 없어서" 우리 글로 발표 못해 박창훈 씨 담(談)
「박 박사 축하연」, 『동아일보』 1925. 3. 2. 새로 의학박사로 된 박창훈 씨의 축하회를 시내 각 사회유지들의 발의로 재작 이십 날 오후 여덟시에 남대문통 식도원에서 개최되었는데 발의자 측 김규면 씨의 사회로 변호사 이인 씨의 개회사와 본사 고문 송진우 씨의 발기인 대표로 축사와 박씨가 졸업한 수하동 보통학교 야중(野中)교장의 축사와 김연수 씨의 축사 등이 있고 박창훈 씨의 답사로 회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후에 연석으로 돌아 환담을 받고 열시반경에 폐회하였는데 내빈이 구십 여명이나 되어 매우 성황이었다더라. (사진은 박 박사 축하연) |
박창훈의 화려한 이력은 일본인 스승 志賀潔 박사의 "어렸을 적부터 수석만 해온…비상한 천재"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게 대단히 우수한 학업능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게 해주지만 그의 초년기는 힘든 역정의 연속이었다. 어려운 환경을 각고의 노력으로 이겨내고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입지전적 인물 박창훈은 당대의 '스타의사'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경도제국대학 교수회에서 통과되자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기사로 소개하였고 특히 『동아일보』는 1면의 「사설」로 축하할 정도로 민족사회의 기대가 컸다. 박창훈은 유수한 신문과 잡지에 여러 차례 기고를 하고 언론사의 대담, 인터뷰 등에도 자주 등장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였다. 1934년 11월에 발간된 월간지 『개벽』발간 축사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삼천리사 사장 김동환, 변호사 이인 등 당대의 명사들과 함께 축사를 한 것도 당시 민족사회에서의 그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삼천리』 제11권 제1호(1939년 1월 1일)의 기사 「기밀실, 우리 사회의 제내막」에서 청구구락부 회원을 소개하면서 "박창훈, 하준석, 민규식, 박흥식" 등을 언급하였다. 박창훈은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실업가 하준석, 민규식, 박흥식 등에 앞서 언급될 정도의 비중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박창훈이 1929년 11월에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치료한 사실도 의사로서의 그의 비중과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