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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의사 박창훈의 서화수장: 오봉빈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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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새로운 근대 수장가, 박창훈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1940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일제시기의 대표적 화상(畵商)으로 조선미술관을 경영한 오봉빈의 「서화골동의 수장가 - 박창훈씨 소장품매각을 기(機)로」라는 장문의 글이 실렸다. 오봉빈은 이 글에서 당시 주요한 고미술품 수장가로 '오세창⋅박영철⋅김찬영⋅함석태⋅손재형⋅박창훈'을 꼽은 후 '외과의의 태두'인 박창훈이 "혜안(慧眼)과 온축(蘊蓄)과 욕심과 희생을 성경(盛傾)하여 엄선에 경가정선(更加精選)하며 수집하신 서화와 골동"을 "전부 출방(出放)"함을 아쉬워하였다. 특히 박창훈의 수장품 가운데 『동한류편(東翰類編)』이 일제시기 당시 조선에서 행해진 미술품 경매회에서 최고가인 7,250원에, 『열상정화(冽上精華)』가 4,000원에 낙찰된 것에 주목하고 이 두 물건의 새 주인에게는 "조선의 국보"이니 "신중히 보관하시기를 재삼 부탁"하는 것으로 글을 마쳤다. 오봉빈의 글은 박창훈에 대해서는 물론 당시의 미술시장과 수장가들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담고 있어 아래에 전재한다.


오봉빈의 「서화골동의 수장가 - 박창훈씨 소장품매각을 기(機)로」,
『동아일보』 1940. 5. 1. 3면(부분).

서화골동(書畵骨董) 내지 고물등속(古物等屬)은 일부 특수층단(特殊層段)의 애롱물(愛弄物)이라 간주하고 일반은 이 등속(等屬)에 대하여 별로 관심치 않았었다. 일본 내지인과 중국인사는 선인유적과 고물에 대한 애호심이 일반적으로 상당히 발달되었었다.
  그러나 우리 조선에서는 서화 외 골동을 애호하고 수장하는 사람을 기습(奇習)이 있는 별(別) - 이상(異常)한 사람들이라 일반이 간파하여왔다. 필자의 아는 범위로 말하면 진정한 의미로 선인유적을 애호하고 수장한 이는 우리의 대선배인 위창(葦滄) 오세창씨(吳世昌氏)와 괴원(槐園) 점패씨(鮎貝氏) 등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십년 전까지 이것을 성심으로 애장한 이는 저축은행 두취(頭取) 삼씨(森氏), 상은두취(商銀頭取) 화전씨(和田氏), 경전전무(京電專務) 무자씨(武者氏) 등이라고 기억된다. 현하(現下) 우리 조선인사(朝鮮人士) 중 대수장가는 다 십년 이내로 성의가 열심으로 수집한 이들이다. 여하간 서화골동의 애장열이 일반화 보편화되는 것은 서(書)나 화(畵)가 그 작가 개인의 개성을 발휘한다는 말과 같이 서화 수장가 역시 그 개인의 성격에 합하는 물건을 모는 듯한 관(觀)이 있다. 고(故) 다산(多山) 박영철씨(朴英喆氏)는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라 그가 수집한 서화골동도 둥글하고 모두 밉지 않은 물건이다. 그가 작고 후에 진열관 건축비로 일금 수만금을 첨부하여 서화골동 전부를 영구보존키 위하여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한 것은 누구나 다 잘한 처리라 경의를 표한다.
  유방(維邦) 김덕영(金悳永: 前名 讚永)씨는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선인이요 호인이라.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고려기(高麗器)를 위시하여 서화골동 전부가 호품(好品)이요 진품이다.
  토선(土禪) 함석태씨(咸錫泰氏)야말로 모든 일을 샐 틈 없게 하는 이다. 소털을 쏟아서 제 구멍에 쏟는 이가 있다면 아마 이 함(咸)씨라 할 것이다. 이가 모은 서화골동 전부가 다 기기묘묘하고도 모두가 실적(實的)인 물건뿐이다. 이모저모로 보아도 좋은 물건뿐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무호(無號) 이한복씨(李漢福氏) 수장품은 함씨가 유사할 것이 많이 있다. 요모조모로 이 기기묘묘하며 소품이면서도 대물거품(大物巨品)을 능가할 만한 - 간단히 말하면 조선에서는 소물진품대왕(小物珍品大王)이라.
  소전(素荃) 손재형씨(孫在馨氏)는 청년서도대가(靑年書道大家)요 그 위에 감식안(鑑識眼)이 충분한 이다. 그 방면에 감별안과 취미가 많고 또 자력(資力)이 충분하니 그가 모은 서화골동 전부가 다 일품(一品)이요 진품(珍品)이다. 누구나 다 흠선(欽羨)하는 바이다. 서언(誓言)이 너무 길어졌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금번 조선 초유의 성황으로 대매립(大賣立)을 한 의학박사 박창훈이라기 보다 더 유명한 청원(靑園) 박창훈선생은 대체 어떠한 물건을 모았길래 그와 같은 인기가 있었던가. 박씨는 외과의의 태두로 십여년래 환자들을 친절정녕(親切丁寧)히 취급하여 주신다는 것은 세상에서 정평이 있으니 이 말은 그만두고 박씨가 혜안과 온축과 욕심과 희생을 성경(盛傾)하여 엄선에 경가정선(更加精選)하며 수집하신 서화와 골동이라는 것은 필자 뿐아니라 이는 다 아는 바다. 그이가 십여년 이래로 고인 유적 수집에 자수(自手)로 고심한 것은 친근자(親近者)로서 경탄치 아니할 수 없었다. 박씨가 금번 매립한 근삼백점은 그야말로 립립개신고(粒粒皆辛苦)라 할 수 있다.


박창훈은 1940년과 1941년의 두 번에 걸친 경매회에서 자신의 수장품을 모두 처분하였다. 이 사진은 1940년 4월, 서울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개최된 경매회 당시 발간된 경매도록인 『부내박창훈박사소장품매립목록』에 실린 황희 등 1,200여 인의 ≪동한류편≫(전47책) 부분이다. 지금은 소재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성의와 열심 그 위에 선인을 추공존숭(追恭尊崇)하는 거룩한 마음으로 구득(求得)한 미술품을 전부 출방치 않으면 안될 사정이 나변(奈邊)에 있는가. 박씨는 의업으로 성공자 중 일인이니 물적 고통이 만무할 것이다. 그러면 그 - 진의가 어디 있는가. 우리 지인은 매우 궁금하였고 속으로 박씨를 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박씨는 이렇게 말한다. 박씨는 팔대독자 더구나 자기는 유복자로 태어나서 소시에 무한한 고초를 받으면서 자라나서 사회의 恩德으로 이만큼 되었으며 게다가 윤대(允代)에 없던 자복(子福)까지 차지하여 지금 슬하에 칠팔남매가 있다구 작년에 장자가 성남중학 금춘(今春)에 장녀가 경기고녀에 입학된 것을 계기로 자녀교육비를 적립하여야 부모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이라 금번 매립의 동기가 여기에 있다 한다. 옛날에 복불쌍전(福不雙全)이라 하였으니 자신이 선대에 못 가졌던 이와 같이 복을 다점(多占)하였으니 중요미술품까지 점유하고 있을 염치가 없으니 이것만은 동호유지 제행(諸行)에게 분양하노라는 지극히 아름다운 의사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뜻에서 출발한지라 우리 유지동호(有志同好)도 아름답게 받아서 조선서 초유의 매립총액이 칠만수천원에 달하였다. 그가 십여년 동안 고심에 고심을 가한 동한류편(東翰類編: 전부 오십책 황희 이래 천삼백여인 친필)이 조선서 최고 기록(칠천이백오십원)으로 경성 유지 강익하(康益夏)씨에게 열상정화(洌上精華: 역대명화 백오십인 분가액(分價額) 사천원)가 원산유지(元山有志) 윤훈갑(尹訓甲)씨에게 이관(移管)된 것은 만공(滿空)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상 양품(兩品)은 조선의 국보라 할 수 있으니 강, 윤 양씨는 신중히 보관하시기를 재삼 부탁한다.

* 한자를 대폭 한글로 바꾸었고 일부 한자를 병기하였으며 현대 문법에 따라 수정한 부분이 있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5.01.3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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