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가의 고금」은 장택상이 그의 호 '滄浪散人'이라는 필명으로 1934년 6월 22일(금)부터 30일(토)까지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朝鮮中國名作古書畵展覽會)’를 앞두고 세 번에 걸쳐 『동아일보』에 쓴 글 중 마지막 글이다. 장택상은 이 글에서 조선시대의 대수장가 안평대군 이용, 낭선군 이우, 상고자 김광수, 육교 이조묵, 역매 오경석, 운미 민영익을 열거하고 이들이 수장했던 수장품의 특징과 미술품 수장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한국미술사학계에서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이 10여년 남짓인데 1934년에 이러한 글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수장가의 고금」, 창랑산인, 『동아일보』 1934년 6월 21일
"미술은 민족적으로 사수할 필요가 있다. 왕석(往昔: 옛적)의 광영을 자랑하자면 미술 아니고는 증거할 수 없다." |
다소 거칠지만 정곡을 찌르는 발랄한 문장을 통해 그의 문화재 사랑을 실감할 수 있으며 아래에서는 수장가로서의 확고한 의식도 엿보인다.
"이 시대에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다른 사업도 필요하지마는 우리 정화의 결정품을 보관하자. 외출방지를 실지화(實地化)하자면 유지가(有志家)가 각성하여야 하겠다." |
장택상이 미술품 수장가와 미술품의 중요성 등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1920-30년대, 특히 30년대가 ‘골동품 거래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장택상을 위시한 근대의 수장가들은 당시 무수히 도굴되어 유통된 고려청자 등 우리나라 미술품을 어렵지 않게 수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의 미술시장과 변천에 대해서는 차후 상술하고자 한다.
오경석의 아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편집한
『근역서화사(槿域書畵史)』의 「오경석 조(條)」
신라에서 근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서화가에 관한 문헌기록을 모아 편집한
『근역서화사』는 오세창의 필사본으로서, 활자본으로 출간할 때는 책명을
『근역서화징』(계명구락부, 1928)으로 바꾸었다. ‘한국미술사의 보전(寶典)’이라
일컬어지는 『근역서화징』 등의 작업이 가능한 것은 오경석으로부터 내려오는
가학(家學)과 전통에 의한 것이다.
「수장가의 고금」, 창랑산인(滄浪散人) 서화수장은 순위로 말하면 중국 일본 조선이다. 조선은 수장가로 저명한 사람은 극히 희소하다. 이조 초엽에 안평대군(安平大君: 李瑢)이 명품거작을 왕자의 기세로 천금을 불석(不惜)하고 다수 매입하여 그 목록 잔편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실물은 병화에 손실되고 또 조선 사람의 수장관념에 대한 결핍으로 진기한 법물(法物)들이 다 운산(雲散)되었다. 또 중엽에 와서 낭선군(朗善君: 李俁)이 중외금석법첩(中外金石法帖)과 서화골동을 많이 수장하였으나 차(此) 역시 출처가 불분명하고 상고자(尙古子) 김광수(金光遂)가 수장에 저명하며 말엽에 와서 이육교(李六橋) 조묵(祖黙)은 가세가 부요(富饒)하고 학식(學識)이 고명하며 시문서화가 다 구비하였다. 중국명류들과 교유가 빈번하여 불후의 진품을 다장(多藏)하였으나 지금 와서는 하나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만일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하면 동양무쌍(東洋無雙)의 보물이다. 미술은 민족적으로 사수할 필요가 있다. 왕석(往昔)의 광영을 자랑하자면 미술 아니고는 증거할 수 없다. 나옹일세(那翁一世: 나폴레옹 1세)가 이태리를 정복하고 첫 정사(政事)가 박물관의 비장품을 절거(窃去)하였고 북청사변(北淸事變)에 연합군의 첫 사(事)이 영업무전(英業武殿)의 비장품을 약탈하였다. 이만큼 미술품이 국가나 민족의 이목을 용동(聳動)한다. 우리는 우리 수중에 남아있는 미술품도 인식부족으로 다 버리고 말았다. 참 비참한 사실이다. 최말엽에 와서 오역매(吳亦梅: 吳慶錫), 민운비(閔芸楣: 閔泳翊) 양 선생은 참 우리에게 없지 못할 은인이다. 현재 조선에 남아있는 미술품은 다 이 두 선생의 비장(秘藏)하였던 것이다. 이거나마 외지로 산실이 많이 되고 잔품이 아직도 우리 수중에 약존약무(若存若無)하다. 역매선생은 청조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석학홍유(碩學鴻儒)들과 왕래가 잦았고 또 감식에 고명하여 희세의 진품을 많이 조선에 수입하였다. 중국 본지에서도 구할래야 구하지 못할 진품이 조선에 와서 남아있다. 운미는 초방귀척(椒房貴戚)으로 일찍 무사(無事)를 비탄하고 급류용퇴격(急流勇退格)으로 상해에 피신하여 한묵(翰墨)에 종사하였다. 상해는 물질문명 뿐아니라 정신문명의 중심지다. 당시 강남대가들이 상해에 웅거(雄據)하고 있었다. 운미는 원래 물질의 속박이 없으므로 차등 명류들과 나날이 □집(集)하고 문주(文酒)로써 세월을 보내었다. 그가 사망한 후에 자기 평생 애완하던 비장품 중에 삼분의 이는 상해에서 없어지고 나머지는 조선으로 와서 삼산오열(三散五裂)되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없어진 나머지에 천신만고로 구득하였다. 참 참혹하게도 인식부족한 일이다. 나는 생각하건데 이것이나마 우리가 사수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왕석(往昔)의 광영도 돌보아야 한다. 수장가의 책임이 우리 조선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중요미(重要味)가 있다. 칠영팔락(七零八落)한 우리의 미술품을 사력을 다하여서도 견수(堅守)하자. 국보외출방지령(國寶外出防止令)이 생긴 이 시대에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다른 사업도 필요하지마는 우리 정화의 결정품을 보관하자. 외출방지를 실지화(實地化)자면 유지가(有志家)가 각성하여야 하겠다. 조선전토에 고대건물은 나날이 훼철되어 다시 빙거(憑據)할 수 없고 경성시내에 유수한 대가도 집장수 손에 다 훼철되고 만다. 조선건축의 윤환미(輪奐美)는 다시 볼 수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결론은 조선민족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금자탑은 그림자도 없이 된다. 외인의 손에 없어지도 않고 우리의 손에 다 없어지고 만다. 구주대전(歐洲大戰)에 백이의(白耳義: 벨기에)나 불란서(佛蘭西) 고대건물이 독일 포화에 파괴된다고 중립국이든 미국이 엄중항의 하였다. 우리는 누가 항의할꼬 생각하면 비통하다. 이와 같이 몰각(沒覺)한 일을 보고 지내기가 정말 어렵다. 조선미술의 구세주가 다시나지 않는가. 학수(鶴首)로 고대(苦待)한다. 우미(優美)함이 좋고 추악(醜惡)함이 싫은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우리의 실력으로도 자각만 하면 많은 미술품을 아직도 수장할 수 있다. 유지자(有志者)여 한번 생각을 다시 하여 보자. Something is better than Nothing.이 우리의 모토이다. (結) |
* 이 글에서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원로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月刊 文化財』 1972, 2월호에 이 내용을 전재(轉載)하여 소개한 글을 참조하였다.
* 한자를 대폭 한글로 바꾸었고 일부 한자를 병기하였으며 수장가 이름이나 설명을 ( )안에 추가하였다. 현대문법에 맞게 바꾼 부분이 있으며 ‘□’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