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은 그의 호 '滄浪散人'이라는 필명으로 1934년 6월 22일(금)부터 30일(토)까지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朝鮮中國名作古書畵展覽會)’를 앞두고 세 번에 걸쳐 『동아일보』에 「조선, 중국서화의 특색」(상․하, 6월 17․19일)과 「수장가의 고금(古今)」(6월 21일)을 썼다. 이 글들은 장택상의 미술관과 서화관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은 미술의 국가다', '(김홍도는)조선이 산출한 화성(畵聖)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희는)한자가 발생된 이후에 처음 보는 능서가(能書家) 대장(大匠)이며 (서예가만이 아니라) 경학(經學)의 대가이다', '(김정희의 서법은)조선 산천과 같다' 등의 정곡을 찌르는 기발하고 명쾌한 표현은 지금도 깊이 음미할 만하다.
* 한자를 대폭 한글로 바꾸었고 일부 한자를 병기하였으며 화가 이름을 ( )안에 추가하였다.
* 현대문법에 맞게 바꾼 부분이 있으며 ‘□’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이다.
도 1) "본사 학예부 주최 고서화전을 앞두고"
"조선, 중국서화의 특색【상】소장가 및 출품자로서의 일언(一言) 창랑산인(滄浪散人)"
『동아일보』 1934년 6월 17일
본사 학예부 주최 고서화전을 앞두고
조선, 중국서화의 특색 【상】 소장가 및 출품자로서의 일언(一言) 창랑산인(滄浪散人)
『동아일보』1934년 6월 17일
조선은 미술의 국가다. 이조 오백년에 문예라든지 공예라든지 각 방면이 다 발달되었다 할지라도 특히 단청의 기예가 최고의 정도로 발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화(朝鮮畵)의 특장은 평화스럽고 담박하고 윤곽의 미가 매우 사랑스럽다. 중국화는 아마도 그로테스크한데 가깝다. 비록 기공(技工)은 발달되었으나 평화스럽지 못하다. 조선화의 생명은 평화요 담박이다. 색채로 보아도 조선화는 중국이나 일본화와 같이 난잡하지 아니하고 천주(淺朱)와 담록(淡綠)을 상용하여 조선 산천초목과 가옥 방구(房具)에 적합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로 보면 우리 조선화는 세계 화계(畵界)에 특수(特秀)한 지위를 점거하고 있다 하겠다. 예술을 실생활에 응용할 줄 알았다. 참 위대한 일이다. 이조 오백년 중에 가장 조선미(朝鮮味)를 될 수 있는 대로 사출(寫出)하려고 노력한 화가는 정겸재(鄭謙齋: 鄭敾)일것 같다. 조선 산천을 실사한 화가는 겸재뿐이다. 겸재는 기술도 우미할 뿐아니라 지방 색채를 우리의 실생활에 가미하려고 자기의 기술을 무한히 연마하였다. 대개 여배(餘輩)의 화가는 지나의 화본을 모사한데 불과하고 자연을 직접 연구하여 사출치 아니하고 Secondhand의 자연을 모사하였다. 겸재는 차등 누습을 이도(利刀)로 단거(斷去)하였다. 위대한 사상가요, 시인이요 기예가다. 단순한 화가로 볼 수 없다. 심현재(沈玄齋: 沈師正)는 겸재의 문도로 남화대가다. 무한한 전원취미 있는 화가다. 기술도 중국대가에게 비교하여도 추호도 손색이 없다. 연이나 다못 한되는 일은 자연을 직접으로 호흡하고 음미치 못하고 Secondhand로 모출(模出)하고 말았다. 김단원(金檀園: 金弘道)은 중국 왕석곡(王石谷: 王翬)과 같이 남북화를 겸사(兼寫)하여 일가를 독창한 화가다. 인품도 고상하고 천재의 기가 횡일하다. 단원의 화본을 상완(賞玩)할 때 일견에 비상한 예감을 태기(怠起)한다. 선획이 선명하고 준법이 강건하고 또 섬려한 품이 이태리 부흥시대의 작품을 보는 감상이 발한다. 색채는 주로 주황과 진청을 다용하여 종교화보는 기분이 있다. 참 우리 조선이 산출한 화성(畵聖)이라고 할 수 있다.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李寅文)은 조선 근대 화가 중에 제일 예술양심이 풍부한 작가인 것 같다. 비록 소폭이라도 용의가 주도하고 치밀하다. 역시 조선미술을 고상한 경계로 지도한 은인이다. 이상은 대개 화계의 명성을 소개하였거니와 다음에는 조선은 고사하고 극동 대륙에 유일무이하고 한자가 발생된 이후에 처음 보는 능서가(能書家) 대장(大匠) 김완당(金阮堂: 金正喜) 선생을 소개코저 한다. 선생의 심법(心法)은 천일(天日)과 같이 소명(昭明)하고 학문은 산해와 같이 숭심(崇沈)하고 서도의 기예는 상으로 진한(秦漢)을 직추(直追)하고 하로 진위(晋魏)를 예시(睨視)한다. 금석(金石)에 대한 조예는 청조 거장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양 선생이 일좌(一座)를 허여 하였다. 서예는 변함을 귀중히 안다. 선생의 서법은 만편만률(萬編萬律)이라 풍운(風韻)이 진진(津津)하고 예미(藝味)가 도도(滔滔)하다. 섬려할라면 미인의 아미(蛾眉)와 같고 분방할라면 천마가 공계(空界)로 치구(馳驅)하는 것 같다. 근엄하고도 친절미가 있고 한험(寒險)하고도 덕성미가 있다. 선생의 서법은 조선산천과 같다. 미(美)하나 악(惡)하나 다시는 길항(拮抗)할 만한 산천은 없다. 유일하고 무이한 독특성을 가진 필법이다. 선생의 사후 백년이 미만하여 명료히 천지에 □□하고 백대의 사표가 되었다. 우리 조선 사람은 완당을 단순한 서가(書家)로만 본다. 차(此)는 협견(狹見)에 불과하다. 청조의 특산물인 고증학에 심심(深甚)한 조예가 있고 또 경학(經學)의 대가다. 옹담계(翁覃溪)와 완운대(阮芸臺)같은 대학자가 무조건으로 굴지하였다. 차후 백년에 완당은 진면목을 □□게 될 줄 안다.
도 2) 1934년 6월 22일(금)부터 30일(토)까지 동아일보사에서 개최한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 사고(社告)
"천고불후의 신품거작 금일부터 일반에 공개 본사루상에 공개된 이백칠십점 삼일마다 교체출품"
『동아일보』 1934년 6월 22일
본사 학예부 주최 고서화전을 앞두고
조선, 중국서화의 특색 【하】 소장가 및 출품자로서의 일언 창랑산인
『동아일보』 1934년 6월 19일
조선 뿐아니라 우리와 재래의 문예, 학문, 공예에 특수한 관계가 있는 중국서화도 이 전람회에 출품하기로 하였다. 명조(明朝)의 거장 문징명(文徵明), 동기창(董其昌), 주지번(朱之蕃) 제선배의 서여화(書與畵)가 다 일당(一堂)에 광채를 방(放)하게 된다. 그 중 동기창서첩은 선생의 만년 작품으로 청조 제명사가 입에 침이 없이 칭찬하였다. 원래 헌묘조 비장으로 있던 것이 우연 민간에 낙재(落在)하여 죽동궁(竹洞宮) 운미(芸楣) 민영익씨(閔泳翊氏)에게 비장되었다가 그 집이 영락한 후에 전전(輾轉)하여 시내 모씨의 비급(秘笈)에 보장되어 문외불출의 보물로 있다가 금번에 출품되게 되었다. 그 외에 청조화가인 왕석곡화첩(王石谷畵帖)은 신자하(申紫霞: 申緯)의 □□이 더욱 색채있다. 옹방강은 청조 삼백년 제일급의 금석학자요 품평가로 우리나라 완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거유(巨儒)이다. 그의 일생 사업으로 혈력(血力)을 경주하여 성축(成軸)한 □수담회권(□水潭繪卷)은 오역매선생(吳亦梅先生: 吳慶錫)이 중국으로 매입하여 조선에 끼치게 되었다. 서화가 사십명의 합작으로 성질(成帙)된 대회권(大繪卷)이다. 그 외에도 중국 강남대가 삼십 여명의 대작이 출품된다. 또 근대 거성 오창석선생(吳昌碩先生)의 작품이 운미의 비장으로 있다가 각수장가의 비급에 낙재되었다가 금번에 출품된다. 참으로 조선으로서는 □고절금(□古絶今)한 대전람회라 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