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고적도보』 15권(1935. 6)에는 당시 장택상이 수장했던 도자기 8점이 수록되어 있어 “천여 점”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던 그의 수장품의 편린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게재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白磁透彫煙管臺及陽文煙管> [『조선고적도보』 十五, 도판번호 6343]
② <染付花鳥文甁> [도판번호 6410]
③ <染付蘭文水注> [도판번호 6443]
④ <染付花文水滴> [도판번호 6489]
⑤ <染付文樣皿> [도판번호 6541]
⑥ <染付梅花文植木鉢> [도판번호 6560]
⑦ <染付蓮及鳥文植木鉢> [도판번호 6561]
⑧ <染付辰砂繪透彫人物筆筒> [도판번호 6610]
* ‘染付’는 ‘청화백자(靑華白磁)’의 일본식 표기이다.
<染付蘭文水注>, 장택상 소장 [『조선고적도보』 도판번호 6443]
박병래가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하여
동궁이 음용하는 그릇에 비상을 쏟아 넣을까하는 우려에서
주전자 입구를 덮어씌우는 장치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 ‘청화주전자’.
③ <染付蘭文水注>는 도자 수집가로 유명한 박병래가 그의 회고록 『도자여적』(중앙일보사, 1974)에서 언급한 “장택상이 수장하고 있던 청화주전자는…청화의 무늬가 있고 수구(水口) 마저 덮어씌우는 쇠장식이 붙어 있는” 주전자로서 “유례가 드문 귀물”로 추정한 그 주전자로 추정된다. ⑧ <染付辰砂繪透彫人物筆筒>은 날렵한 기형이 돋보이며 표면에 그려진 매화는 감각적이고 화려하다. 이상의 유물들은 장택상이 “귀하면서도 화려하고 맛이 있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했다”는 골동 거간을 지냈던 지순택의 평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染付辰砂繪透彫人物筆筒>, 장택상 소장 [도판번호 6610]
“귀하면서도 화려하고 맛이 있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했다”는
지순택의 평을 확인할 수 있는 청화백자필통.
장택상 별장의 성쇠
장택상 수장품은 6․25사변으로 인하여 서울 저택은 물론 경기도 시흥과 노량진의 별장도 파괴되었다. 시흥별장에서 전투가 벌어져 이곳에 보관하였던 숱한 유물들이 사라졌으며 노량진별장에도 일부를 두었다가 직격탄을 맞아 대부분 파괴되었다. 노량진 별장은 1500평의 대지 위에 150평의 대저택으로 일제시기에 일본인 아라이라는 일본인에 의해 지어 졌다고 하는데, 강화 초지진에 있던 대포를 별장의 현관 기둥으로 할 정도로 위세당당한 집이었다. 별장 현관 기둥으로 썼던 대포는 해방 후에 장택상의 아들이 강화도 초지진 복원 소식을 듣고 다시 기증했다. 당대의 권력가 장택상의 풍모에 걸 맞는 별장이었다고나 할까. 이후 장택상 수장품은 이승만과 맞서기 위한 정치활동 등으로 인하여 주요 유물을 판매하는 바람에 많이 흩어졌다고 전한다.
지금은 별장식당이 된 장택상의 노량진 별장.(노량진역 부근)
김진송,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 1968 노량진, 사라진 강변 마을 이야기』(세미콜론, 2006)에서.
1969년 8월에 장택상이 사망하자 영결식은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장택상 사후 소지품을 위시한 유물들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1972년 11월 20일에 작성된 영남대학교박물관의 『故滄浪張澤相所藏所持品(日用品)寄贈目錄』을 통해 금동불상 2점 등 금속류, 옥석류 9점, 도자기류 9점, 전적류 15점, 서화류 10점 등과 다수의 장택상의 소지품 122종 350점이 기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택상의 고미술품에의 열정과 감식안 등은 아직도 이 방면 애호가들에게 회자되곤 한다. 고미술품 수집과 매매에 기벽(奇癖)이 있었지만 장택상은 수집한 고미술품의 질적․양적인 측면에서 모두 최상위로 꼽히는 중요한 수장가이기 때문에 한국 근대의 수장가를 언급할 때면 가장 먼저 다뤄야 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자신의 수표동 자택에서 다른 수장가 들과 함께 일종의 ‘살롱’을 만들어 이 방면 문화의 심화와 확산에 기여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