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은 재기발랄한 데다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다"라는 지론을 가질 정도로 감성이 풍부했다. 그가 고미술품을 많이 수집한 것은 본래의 풍부한 예술적 감성에다 영국 유학 당시 직접 경험한 서구인들의 고미술품과 예술에 대한 높은 인식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장택상은 고미술품 수집가이자 국악 애호가이기도 했으며 일용장식품도 특이하고 진귀한 것만을 가졌다고 광복군 참모장,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은 회고한 바 있다.
장택상이 고미술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고 감상활동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9세 때인 1921년 영국에서 귀국한 이후로 여겨진다. 당시 곧 일제시기 초반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활발히 고미술품을 수장한 인물은 박영철, 김용진, 함석태, 김성수, 장택상, 김찬영, 이병직, 박창훈 등이 꼽힌다. 이들은 전형필이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기 전 시기의 주요 수장자라 할 만한 인물 들이다.
장택상 살롱
장택상은 1933년 그의 나이 41세에 대구에서 서울의 수표동으로 이사하였다. 당대의 부호로 탁월한 국제 감각, 능란한 외교력, 뛰어난 감상안을 갖춘 데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장택상의 집은 호사가들의 일종의 공동 회합장소가 되었다. 당시 장택상의 사랑방에 모이던 고미술품 수집가들은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윤치영, 치과의사 함석태, 한성은행 두취를 지낸 한상룡의 동생인 서화수집가 한상억, 서화가 이한복, 배화여중 교장을 지낸 이만규, 화가 도상봉, 손재형, 이여성, 의사 박병래 등이었다. 이들 외에 김성수, 유억겸, 조병옥, 구자옥, 변영로, 이관구 등의 정치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등도 수표동 장택상의 사랑방을 자주 출입하였다. 이 모임에 대하여 장택상의 셋째 딸로 그의 일대기를 쓴 장병혜는 “골동품의 동호자라는 명목으로 어울렸지만 그들의 속셈은 국내 항일 세력의 결속”이었다는 극히 우호적인 평가를 하기도 하였지만, 백자 수집가로 유명한 박병래는 이 모임을 “(장택상 사랑방에서) 저녁때가 되면 그날 손에 넣은 골동을 품평한 다음 제일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상을 주고 늦으면 설렁탕을 시켜먹거나 단팥죽도 시켜놓고 종횡 무진한 얘기를 늘어놓다 헤어지는 게 일과였다.”고 회고하였다. 어쨌든 장택상은 1930년대 초 곧 그의 40대 초중반에는 대개 수표동 자택에서 은거하며 골동수집과 감상 등으로 소일한 셈인데, 그의 고미술품 감상과 수집활동은 만년까지 계속되었다.
장택상의 노량진 별장 입구의 현관 기둥으로 사용되던 초지진 대포
(길이 2.32m, 입지름 40cm)
막강한 권세를 가진 장택상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장택상의 아들이 강화도 초지진 복원소식을 듣고 기증하였다.
눈썰미 있고 이재(理財)에도 밝은 수장가
일제시기 당시 조선인 수장가들은 재력 면에서 일본인들에 비해 워낙 차이가 있어 값비싼 물건은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나 장택상과 전형필은 일본인에 맞서 고급 물건을 많이 수장하였다. 두 사람은 주로 거간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였다. 전형필은 일본인 골동상 온고당 주인 신보기조(神保喜三)를 통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서화 및 도자 등을 구입하였고, 고서는 한남서림 이순황을 통해 구입하였다. 장택상의 집을 출입하던 거간으로는 ‘호랑이’라는 별명의 고급 거간으로서 특히 서화 감식에 뛰어났다고 전하는 유용식이 우선으로 꼽히며 김수명, 지순택 등도 출입하였다.
고미술품 애호가들과 고미술상들은 장택상의 고미술품 감식안은 높이 평가하였지만 장사 수완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증언하였다. 박병래는 “장택상은 좋은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었거니와 골동품을 사고파는데도 임기응변의 기지를 보였”으며 “돈속에도 아주 밝은 수집가”로 평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좋은 물건을 많이 샀지만 5-6점을 사면 그것을 친구에게 소개하고 그중에서 1-2점을 사례로 받기도 하였고 상인에게도 맞돈을 주지 않고 물건과 바꾸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대개 상인들이 손해 보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 시절 거간으로 활동한 바 있는 도예가 지순택은 장택상이 “귀하면서도 화려하고 맛이 있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평한 바 있으며, 역시 거간이었던 변윤식은 장택상이 “우선 가짜라 말해 놓고 값을 깎아”내렸다고 하며, “거만한 면이 있었고 남들이 굽신거리기를 바라는” 행태를 보였다고 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 장택상의 딸이 사는 하와이로 보내진
칠곡 금오산 선봉사지 석탑.
장택상은 1964년 1월에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고 케네디대통령 묘소 옆으로
자기 소유의 석탑 1기를 보내겠다는 제의를 하였다가 여의치 않자
하와이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