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1893-1969)
‘난세의 정치인’, ‘천재적 능변가’,
‘정치의 곡예사’, ‘기고만장의 기염아’, ‘술수의 화신’
이상은 모두 근현대 한국정치사의 거물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국무총리까지 오른 장택상은 정치가로서 파란만장하고 굴곡 많은 인생을 보냈다. 정치가로서의 장택상의 일생은 잘 알려져 있지만 미술품 수장가로서의 면모에 대하여 주목되지 않았다. 그의 가계와 생애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광복회에 살해된 부친
장택상은 1893년 10월 22일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에서 아버지 인동 장씨 승원과 어머니 풍양 조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인 오태는 한말에는 인동군 북삼면이었고, 1914년에는 칠곡군 북삼면에 속하게 되었다. 오태는 인동 장씨 남산파의 일부가 세거하던 곳으로 인동 장씨들은 영남학파의 전통 위에서 특히 선조 때의 장현광의 학문을 추앙하였다.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에 대하여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장승원은 판서 장석룡의 아들로 부자가 악행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장물(절도, 강도, 사기, 횡령 따위의 재산 범죄에 의하여 불법으로 가진 타인 소유의 재물)을 탐하였으므로 그들의 가산은 수만 냥이나 되었다.”는 신랄한 평을 하였다.
장택상 생가: 경북 구미시 오태 1동. 현재는 한정식 집이 되었다.
장승원은 188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교리, 사헌부장령, 청송군수, 경상북도관찰사 등을 지냈는데 청송군수로 재직할 당시 농민들이 여러 차례 고발할 정도로 탐관오리였다. 관직에서 퇴임한 후 향리인 오태에서 살던 장승원은 1917년 박상진 등 대한광복회 단원들에게 피살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의병출신이 중심이 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지향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지만 자산가들의 비협조로 군자금 모집 활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대자본가 1명을 암살하기로 하였는데 그 대상으로 장승원이 되었던 것이다.
형은 경북 최고의 친일 부호
장승원의 세 아들 길상, 직상, 택상은 모두 긍정적 측면에서든 부정적 측면에서든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길상과 직상은 장승원의 사망 이후 그 근거지를 대구로 옮겨 지주자본을 근대적인 금융,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였고, 부르주아 민족운동과 친일활동을 넘나들며 교육운동과 경제활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칠곡 장씨 형제가 대구로 이주한 것은 고향에 안주하다가는 아버지와 같은 변을 당할 염려도 있고, 그 곳에서는 자신들의 자본을 성장시킬 수 없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길상과 직상은 1920년 1월 대구에서 경일은행을 설립하여 두취(은행장)에 길상, 취체역(이사)에는 직상이 앉았으나 실질 경영은 직상에 의해 주도되었다. 길상은 1911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꼽은 전국 50만원 이상 자산가에 꼽히는 대자산가였으나 소작인들에게 가혹한 수탈을 일삼아 지탄을 받는 악덕지주였다. 길상은 소작인들에게 가혹한 소작료를 물리다 인심을 잃어 대구를 떠나 서울로 이주하였다. 직상은 1927년에는 대구상공회의소 회두(회장), 1930년에는 총독부 중추원 참의에까지 오르는 등 출세의 가도를 달려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로 이름을 날렸다.
장택상은 가문의 재력에 힘입어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연보적 생애는 다음과 같다. 13세까지 한문을 수학하던 장택상은 14세(1906)에 상경하여 우남학회에서 경영하는 소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15세 때에 일본으로 유학 가서 1908년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김성수, 송진우 등과 교유를 하였다. 19세에 상해, 블라디보스톡, 독일을 거쳐 영국에 유학하여 21세(1913)에 에든버러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17년에 부친이 살해된 후 미국으로 가서 이승만, 조병옥 등과 만나고 김규식, 이관용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구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봄 그의 나이 29세에 귀국한 후 경일은행 상무 등을 지내다 1933년 41세에 서울 수표동 91-1번지로 이사하였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그의 수표동 집은 1930년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들과 주요인사 들의 중요한 모임장소가 되었다. 수표동 장택상의 집에서 이루어진 모임은 일종의 ‘살롱’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훈시를 하고 있는 장택상 국무총리. 1952.5.7 ⓒ연합뉴스
그의 나이 46세 때인 1938년에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장택상은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경기도 경찰부장, 수도경찰청장, 초대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제3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였지만 이후 이승만 반독재활동에 투신하는 등 격한 굴곡을 보였다. 1969년 8월 국민장 거행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희대의 풍운아
장택상이 재기발랄하고 정치수완이 능란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희대의 풍운아답게 풍류와 예술을 즐겼고 자신의 애정행각을 여러 차례 활자화하기도 하였다. 『개벽』 1924년 6월호(48호)를 보면 “…또 형제 경쟁적으로 작첩(作妾) 잘 하던 이근상 형제가 사(死)한 후로는 장택상 형제가 그 후를 계승하얏다 한다.”고 되어 있고 49호에는 “…장직상 제 형제와 한규설 씨도 첩이 2인 이상 잇지마는…”이라 된 것으로 보아 여성편력은 장씨 집안의 공통적인 경향이었나 보다. 1920년대 3대 연애사건의 첫 번째로 꼽히는 등 당시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장병천과 평양기생 강명화의 정사 사건’의 주인공 장병천은 그의 큰형 길상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장씨 형제들은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고 신간회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길을 걷게 되었다. 길상은 악덕지주로, 직상은 조선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출세라 할 수 있는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장택상은 그의 아버지나 형제들과 같이 노골적인 친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뚜렷한 독립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독립운동가들에 호의를 갖고 있지 않았음은 다음의 일화를 통해 드러난다. 장택상이 수도경찰청장으로 임명된 후, 국일관에서 열린 임명 축하연회에서 누군가 그에게 “새 나라의 경찰권을 장악했으니 독립운동가에게도 잘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자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살해되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잘 하겠느냐”고 냉정히 반문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