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의 전시 도록 한 권을 펼쳐본다. 다음 주에 수능을 치르거나 이제 사회인 입성을 앞둔 현역 고등학교 3학년들이 2003년생. 2003년이 벌써 18년 전이라는 이야기다.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이 역사 속의 사건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라는 세대들에게 2003년에 열렸던 전시와 그 때의 새 발견은 곧 옛날 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2003년 11월 학고재에서 열렸던 <유희삼매-선비의 예술과 선비취미> 전시에는 퇴계 이황, 탄은 이정, 조속, 정선, 조영석, 이인상, 이윤영, 심사정, 최북, 허필, 강세황, 강희언, 정약용, 김홍도, 윤제홍, 정수영, 박제가, 김정희, 조희룡, 허련, 김수철, 홍세섭, 유숙, 장승업, 정학교, 안중식, 김응원, 김용준, 이용우, 이상범, 이응노, 김환기 등등등 조선 이후 서화가들의 ‘총출동’이라고 해야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의 작품이 포함됐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 위주였기에 이를 모으는 데 상당한 노력이 들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조윤형 <유희삼매> 행서, 18세기, 종이에 먹, 34x47.5cm
전시에 출품된 조윤형의 서예 “유희삼매遊戱三昧”를 전시 제목으로 해서 선비의 예술과 멋, 취미를 보여주는 것을 테마로 잡았다. 문인화의 멋스런 측면, 그 이어지는 바를 전시에 담고자 했다는 것인데, ‘문인’이나 ‘학자’의 예술, 조선시대 지식인이 지녀야 하는 가치를 내포하면서도 엄격하고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놀이란 그냥 노는 것과는 다른가보다.
도록에 실린 작품을 하나하나 보다 보면, 지금은 많은 논문과 책에 소개되어 익숙해졌던 그림이 꽤 있는데, 당시로서는 꽤 주목받을 만한 요소가 있었다고 본다. 많은 서화가 문인들이 포함된 리스트였기에 개인당 두어 점이 고작인데, 당시로서는 정선이나 김홍도만큼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능호관 이인상의 작품이 10점 가까이 전시된 것도 그렇고, 강세황의 벽오청서도, 박제가의 그림 등은 그 때 처음 소개되거나 오랜만에 대중에게 보여지는 기회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겸재 정선의 《구학첩》도 이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것이다.
겸재 정선 《구학첩》중 <봉서정> 1738, 종이에 수묵담채, 33.5x29.2cm
이인상 <묵죽도> 18세기, 종이에 수묵, 26x50cm
정수영 <강상어락도> 18~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6.5x45.5cm
최북 <한강 조어>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6x39cm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대상 시대의 폭이 다소 넓은 것이 좀 마음에 걸리는데 당시 흥미로운 서화와 그림들로 관람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림들을 넘겨보다 보면 도록 뒷부분에서 논문들을 만난다. 전시회를 계기로 알려진 작품의 미술사적인 의미를 강조하려 한 기획자들의 논문 세 편이 실려 있다. 도록에 실린 논문이 그 전시의 본질과 성격을 제대로 일러주는 것이 맞다면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석농화원』 중에 들어 있었던 서양 그림의 최초 공개였을 것이다. 세 논문 중 하나가 공개된 유럽 동판화에 대한 논문이기 때문(이태호 「석농 김광국 구장 유럽의 동판화를 통해 본 18세기 지식인들의 이국취미」 , 『유희삼매-선비의 예술과 선비취미』 (고서화도록 7), 학고재 2003). 이 글에는 18세기 지식인들의 취향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 있다. 『석농화원』 속에 포함된 서양 그림을 통해 18세기 선비들이 이국 취미를 가졌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논문 중에는 『석농화원』 속에 “외국 그림이 석 점 들어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는데 말로 전해지다가 최초로 공개 됐다”고 쓰여 있다. 한국계 중국인 화가 김부귀의 <낙타도>, 18세기 일본 우키요에 <미인도> 나머지 하나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솅크(Pieter Schenck)의 동판화 <술타니에Sultanie 풍경> 석 점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이전, 1969년에는 이동주 선생이 나뉘어서 전해지던 석농화첩 중 베니스파 풍경 판화와 우키요에 한 점을 보았다는 기억을 되살려 쓰기도 했다(베니스파 라는 것은 잘못된 기억이거나 오판).)
피터 솅크 <술타니에 풍경> 18세기, 에칭, 21x25.7cm (석농 김광국 제평 종이에 먹, 24.5x17.5cm)
김광국을 서화 감상, 감식, 수장으로 유명해지게 만든 화집 『석농화원』에 대해 좀더 찾아본다. 『석농화원』 화첩은 이미 오래 전에 쪼개져서 몇 책이나 되는 것들이 돌아다니고 그 양이 전체적으로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2010년대 초반까지 확인된 바로 간송미술관에 24폭, 선문대박물관에 21폭, 기타 소장처에 10폭 등 모두 55폭의 그림과 화평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3년 한 고서경매에서 『석농화원』이라는 제목으로 석농화원 중의 그림 목록이 쓰여져 있는 육필본이 발견되어 2015년 여름 우리말로 번역, 출간됐다. 이에 따르면 별집과 부록 등 모두 합해 화첩에 원래 수록되었던 작품 수는 267폭에 이른다고. 이 목록을 살펴보면 청나라와 일본의 작품은 위의 두 점 외에도 좀더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서양 그림은 저 풍경화 한 점 뿐이다.
해당 작품은 에칭 동판화이고, 김광국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감상평을 달아놓았다.
“서양화법은 당나라도 송나라도 아닌 그 자체로 별체이다. 작은 화폭에 능히 천리의 먼 경치를 담고, 그 새김 기법 또한 신묘하고 정교하며 비교할 게 없다. 한 폭 수장하여 일격을 갖춘다.”
논문에서는 서양화가 동아시아에 들어온 경위를 간단히 짚고 조선인이 북경에서 최초로 서양화를 접하게 된 인상을 남긴 기록을 살펴본다. 주로 사행원들을 통해 18세기의 조선에 서양화가 유입되는 과정과 관련된 기록을 짚는다.
18세기에는 서양화와 관련된 자료를 사람들이 참조할 수 있었고 강세황 그림 등 서양화에서 자극된 기법이 나타나는 기미가 있었는데, 정조 후반기부터 서학이나 천주교를 금지/탄압하며 그나마 있던 자료조차 소멸되면서 19세기가 되면 서양화풍의 사실적인 표현 기법 등이 약화되고 보수화 경향을 보인다. 18세기 사람 김광국이 어딘가에서 입수했던 네덜란드 동판화에 대해 당대 또는 후대 문인들이 전혀 알지 못했을 까닭이 없는데, 이 그림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 것은 타당한 주장인 것 같다. <술타니에 풍경>이 탄압을 견디고 전해진 것은 김광국과 그 집안의 소신이며 중인층인 의관 집안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라고도 질문한다.
그렇다면 김광국은 어떻게 해서 이 동판화를 구입하게 되었을까. 마침 2002년 한 연구자에 의해 김광국의 몰년과 가계가 밝혀졌었고, 2003년 당시에는 흩어져 있던 석농화첩의 전모가 어느 정도 드러난 상태였다. 소장품 자체가 수준이 아주 높다고 볼 수는 없으나 조선 초기 안견부터 동시대의 화가 소품들까지 모아서 첩으로 꾸미고 여기에 그림의 내력, 화평을 묶고 발문을 붙여 당대의 미술에 대한 시각이 어떠했는지 쓴 예는 거의 유일하기에 자료로서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그런데다 소장품 범위에 중국 명청대 그림과 에도시대 기녀를 그린 채색화에 서양 동판화까지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중인층에까지 서화수집과 감상 풍조가 저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여기에는 그의 집안과 경험과 사회적 분위기의 종합적 영향으로 이국 취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엿보게 해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여항문인들이 사족들과 어깨를 겨루던 유행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글에서는 네덜란드 그림 구입 경로 가능성을 보기 위해 그의 행적을 짚어본다.
1. 사행단과 북경에 갔을 때 입수했을 가능성
김광국 가문은 원래는 양반 집안이었다고 한다. 고조부에서 손자까지 7대에 걸쳐 내의원 의관을 배출한 의관 명문가로 그 또한 1747년 의과에 합격하여 내의원 수의(首醫) 동지중추부사에 오른다. 1776년과 1779년 두 번 의관으로 사신 일행과 함께 북경에 다녀왔다. 1770년대 서학과의 만남이 확산된 시기 서학에 호의적인 인물들과 북경에 다녀온 것이다. 요 시기 청나라는 건륭 연간으로 서구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이탈리아 출신 신부 화가 카스틸리오네(낭세녕)이 궁중 수석 화가로 발탁될 정도였다. 중국 화가들도 유화를 비롯한 유럽 화풍을 익히고 건륭제 때는 동판화가 가장 발달했다. 네덜란드의 경우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명과 청과는 돈독한 교역 관계에 있었으니 네덜란드의 그림들이 중국에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2. 일본을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
잘 알려져 있듯 에도 시기 일본은 네덜란드와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고, 석농화원 중에는 우키요에도 있으니 일본이 솅크 동판화의 입수처일 가능성 또한 없지는 않다. 그런데 솅크 동판화의 제작 시기는 1700~1705년이고 에도 화가 시바 고칸(司馬江漢)이 유럽 그림에서 수평구도의 풍경화를 배워 시도한 것이 1783년 한참 후이다. 시바 고칸은 “네덜란드 상인이 동판 수백 장을 팔려고 했으나, 일본인들은 동판 새기는 방법을 몰랐고 그것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되돌려줬다”고 말하기도 해서, 1780년 이전에는 동판화가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었을 것이다. 또 18세기 후반에는 조선통신사 사행이 단절된 시기였고 1811년에야 재개되어 대일교류의 공백기이므로 일본을 통해 네덜란드 동판화가 유입되는 것은 어려운 일 같아 보인다.
피터 솅크의 그림들은 네덜란드의 신풍(新風)을 따르기보다 북유럽 르네상스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수성을 보인다. 그는 유럽 판화사에 한두 줄 정도 언급되는 거장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동판화 기술 발전에 기여하는 등 나름대로의 업적은 뚜렷하다고 한다.
술타니에라는 곳은 이란 서북부 산악-초원지대의 페르시아 고대 도시로, 13~14세기 몽골 지배하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이다. 그림은 멀리 우뚝 솟은 산이 있고 초원 아래 성곽으로 둘러싸인 고대 도시 술타니에가 수평으로 펼쳐진다. 앞쪽 숲 왼편으로 말과 낙타를 탄 아랍인 복장 병사들이 도시로 이동 중이고 순례자인 듯한 아랍인 복장 두 인물이 그려져 있다. 도성에는 이슬람식 돔 형태 모슬렘, 탑 기둥을 지닌 모스크 사원이 보인다. 17세기 북유럽 풍경화 양식이지만 근경을 낮추어 앞쪽에 배치하는 등 이색적이라면 이색적인데, 오히려 전통 산수화풍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바로 그 점이 김광국의 컬렉션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지?
18세기 조선에 들어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서양화. 비록 소품이고 판화일 뿐이지만.
직접 교역을 하지 않는 멀고먼 나라, 자그마한 조선의 의관 수장가 김광국의 조선 그림 컬렉션에 섞여 화첩으로 꾸며질 운명이라는 것을 제작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이 그림을 둘러싼 정보의 양이 터무니 없이 적기에, 서양화에 대한 호기심 정도는 확인할 수 있겠지만 18세기 선비들의 이국 취미의 확인이나 서학의 수용범위 사례로 확장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싶다. 이 판화가 유입되기 전인 18세기 전반 정선 일파의 진경산수화풍이나 윤두서 이후 신윤복까지의 풍속화풍에서 드러나는 휴머니즘적인 시점 운용을, 관람자를 그림 속으로 이끄는 르네상스적인 장치(예를 들어 근경에 있는 뒷모습의 인물들)과 연결하는 것 또한 조금은 막연해 보인다.
김광국이 솅크의 작품을 택할 때는 호기심과 서양화법에 대한 색다름, 감동 등이 다 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대의 회화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것에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갔던 것은 아니었을지.
이 그림의 존재가 어느 만큼 조선 화단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다. 큰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투시원근법 같은 것만큼 특징이 가시적인 그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파악하기 더 어렵기도 하겠다. 쇄국 분위기 하에서 공개가 힘드니 몰래 돌려보기는 했으려나. 심사정, 김윤겸, 강세황을 거쳐 김홍도에 이르러 현장 사생하고 진경산수화를 그려낸 것이 그 당시의 가장 진보적이고 핫한 이슈였겠거니, 짐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