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회화-한국미의 재발견 6』, 솔, 2005.
한국 옛 그림을 제대로 다룬 듯한 멋진 제목 ‘회화’. 욕심내어 집어들었지만 300여 페이지의 본문. 만만치 않은 두께로 선뜻 읽기 시작하는 데 두려움이 일었다. 역시 못읽으면 쉬었다 가지, 하면서 한 달간을 끌었다.
한국美의 재발견 시리즈는 "청소년과 일반인에게 우리의 자랑스런 미술을 올바로 인식시키고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장르별 시리즈로 기획된" 야심작이다. 앞서의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 문학적이고 개인적인 서술이라면 이 책은 그에 비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에 가까웠다. 우연히도 같은 출판사, 같은 해에 나온 책이다.
책의 앞 1/5 부분은 우리 회화의 재발견이라는 챕터 제목으로 우리 그림의 분야, 시대에 따른 특징이 서술되어 있다. 나머지 4/5는 조선시대 회화의 감상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초기, 중기, 후기, 말기 총 90점의 회화 작품에 대한 소개와 감상이 주된 내용이다. 이 아흔 점의 작품이 시기별로 대표적인 그림이라고 한다면 옛날 초등학교 때 ‘세계명작선집’을 다 읽고 웬만한 서양문학에 대해 아는 체 할 수 있었던 과거를 돌이켜 봤을 때 상당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이 조금 있었다.
정선『서원아회西園雅會』첩 중 <한양전경(삼승조망三勝眺望 )> 1740년, 비단에 담채, 66.7 x 39.7cm, 개인
조선 초기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 네 페이지, 중기에 대한 설명이 네 페이지 정도이다 보니 화가와 작품과 교과서적 설명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만약 조선 회화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열심히 읽을 필요가 없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읽기가 다소 뻑뻑할 것 같다. 상대적으로 다른 책에 비해 특별히 어휘가 어렵거나 난해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일반에게는 낯선 단어들이 연달아 포함되어 문외한에게는 다소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다음 단락에서.
"정선은 한자문화권 산수화에 있어 필수항목이었던 선묘 위주의 중국 북방계 화북산수와 선염 위주의 화남산수를 조화롭게 절충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전개하였다. 화북산수는 투명한 대기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산세를 필선으로 나타내었고, 강남산수는 늘 안개가 끼고 물이 많은 강남의 풍경을 먹의 번짐을 통해 나타냈다. 골산을 표현하는 데 있어 서릿발과 비슷하고 피마준과도 친연성이 보이는 수직선 반복의 금강산준, 겸재준, 정선준 등의 독특한 산악 처리 기법을 창안하였고 근경의 토산은 선염을 사용하는 등 중국과 현저히 구별되는 화경을 이룩하였다."
대학교재나 교과서 분위기의 서술 때문에 그랬던 건지, 읽다가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선묘'와 '선염'은 대강 그 다음의 필선과 먹의 번짐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피마준으로 시작되어 산악 처리를 어떤 기법으로 했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중국과 차별되는 기법을 썼구나 하는 정도. 많은 범위를 다루는 책은 어쩔 수가 없지만 만약 책의 목적에 일반의 미술 소양이 포함된다면 약간의 친절함이 가미된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문턱을 낮추는 안내서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일단 익숙한 주입식 공부 방식대로 정선이 독특한 화경을 이뤘다는 것을 머릿속에 넣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동양화”로 통칭되는 다른 그림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그림이 어떤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저자가 ‘우리 옛 그림의 특징’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만났다.
1. 화면구성과 전개에 있어서 논리성과 완벽성이 떨어진다
- 조촐함이 주는 자유로움, 보는 이로 하여금 팽팽한 긴장에서 벗어나 우리적인 미감으로 변화시킴
2. 수묵 위주의 담채가 주류 (그렇다고 채색을 못한 거는 아님)
3. 모든 분야의 회화에서 획기적인 화풍은 전환은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화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중기 화풍을 연 김시, 후기의 정선, 말기의 김정희가 그랬고, 속화조차도 선비화가 윤두서와 조영석에 의해 태동되었다.
우리의 것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으면서 객관적 시각을 지니기란 어려운 일인 듯 싶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결과물에 대한 정당한 애정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주변 문화에 대한 인정, 교육도 함께 가는 게 맞다. ‘우린 너무 못났어..’ 할 필요도, ‘아닌데? 아닌데? 우리 께 훨 좋은데?’ 우길 필요도 없는데... 어찌되었든 이것이 특성의 다는 아닐지라도 수긍되는 면이 많았다.
저자는 우리 풍속화에 대해서도 특별히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그 의의를 정리해 주셨다.
1. 문인화가 직업화가 구분없이 많이 참여해 큰 흐름을 이뤘다.
2. 시대상 반영. 주관적 오류 제거. 보완자료 기능
3. 전통문화의 효용성 - 창작의 원천.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냄.
김득신 <노상현알> 종이에 수묵담채, 27x33cm, 평양조선미술박물관
낙천성과 해학, 삶의 유연한 자세 같은 것에서 선인들의 미의식을 발견하고, 오늘날 새로운 창작을 위한 구심점이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넣으셨다. 좋은 생각이신 것 같다. 오늘날 작가들이 이 책을 구석구석 잘 읽고 있어야 할 텐데.
개별 그림에 대한 소개로 넘어가면 좀더 편하게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다. <고사관수> <초충도> <동자견려도> <월매> <마상청앵> 등 많이 접하던 그림들에 대한 소개 뿐 아니라 낯설지만 흥미로운 여러 그림들을 소개하고 있다. 2005년 이 책이 나올 무렵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그림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죽 이 그림들을 따라가다 보면, 시대별 특징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시험범위로 하여 객관식이나 단답식 문제를 낸다면 아마 수천 개의 문제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송사 상식 퀴즈에서 한국미술에 관련된 문제은행용으로도 제격. 후반부 그림 설명 부분은 대체로 그 그림과 작가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하고 있지만, 종종 저자의 감상이 들어간 부분도 포함되어 있고, 그림의 뒷이야기나 논란이 되는 부분을 언급하기도 한다.
전 안견 <설천도> 비단에 수묵, 35.2x28.5cm, 국립중앙박물관
읽다보면 전통적인 한국의 미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회화’ 장르를 통틀어 말하는 책이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시대별 특징, 대표작의 감상 일부, 역사적 사실 일부, 의의와 해석 등이 곁들여지는 전형적인 스타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은 넘어가고 몇 번 시간날 때마다 들춰본다면 조금씩 더 많은 것들이 보이고 도움이 되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미.알.못(미술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장애물이 많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한국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미술은 잘 알지 못해도 어느 정도 문자 해석이 가능해서 인류의 지적 재산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죽는 인생이 되고자 인문학적 소양에 귀한 시간을 쪼개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깸”의 기쁨은 누리도록 할 수 있는 책들이 좀 늘어났으면 좋겠다. 어떤 고등학생이, 공대생이, 주부가, 은퇴한 CEO가 국립박물관에서 그림 몇 점을 보고 궁금해서 서점을 찾았을 때, 그를 미술의 세계로 안내해 줄 수 있는 친절한 책이 많았으면 좋겠다.
김두량 <월야산수도> 1744년, 종이에 수묵담채, 81.9 x 49.2cm, 국립중앙박물관
많이 입력하다보니 오류가 나고, 뒤쪽으로 갈수록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라 건성건성 넘어갔다. 이렇게 건성건성 읽어서는 조선시대의 회화에 대해, 아흔 점의 작품에 대해 알게 되는 정도가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감상을 하지 못했더라도 이 다음에 어느 전시장에선가 그 작품을 만나게 될 때는 그냥 처음 만난 것보다는 한 발 더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와서 책을 들여다보면 한번 더 그 숨은 뜻을 이해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