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솔, 2005.
아이들이 학교로 빠져나가고 대강 집을 정리하고 난 오전 시간. 학교설명회에 가자는 아이 친구 학부모의 연락도 있었고, 천만관객을 불러모았다는 한 한국 영화를 볼까, 햇생강을 사다가 생강청을 만들까 이런 저런 생각에 신을 꿰차고 밖에 나왔지만 어째 모두 내키지를 않았다. 나는 오늘도 정신없는 와중에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고 결심을 굳혀 가까운 도서관을 향했다.
문화 향유에 대한 강박으로 평소 친구들과 미술관 박물관에 열심히 다녀보지만 언제나 겉핥기인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이왕 보고 느끼는 거, 적어도 이해는 하면서 봐야겠기에 언젠가는 짬을 내어 꼼꼼히 한국미술에 대한 책들을 시리즈로 읽어 봐야겠다 생각은 했었다. 문화재를 소개하는 책, 감상, 미술품에 대한 시각, 미술사 등 여러 접근의 책이 있고 종종 들춰보기는 했지만 뭔가 부족하고 남은 게 없는 듯하다. 무엇이든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작품과 밀접하게 서술된 설득력 있는 글을 읽고 싶다.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 것 같다.
조선시대의 회화에 대하여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미술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한국 전통 회화를 소개하는 책을 찾아보자니 역시 유명한 故오주석 선생님의 책들이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한국의 미 특강』과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등이다. 이중 예전에 한번 들춰본 적 있는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2005)을 선택했다.
윤두서 <진단타려도> 비단에 채색 111.0x68.9cm 국립중앙박물관
표지로 선택된 그림은 진단타려도. 책 속 11꼭지 중 윤두서와 김홍도는 두 꼭지씩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1999년의 초판본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이었다. 11개의 조선시대 회화 작품을 골라 소개한 책인데, 2005년 저자 사후(死後)에 개정판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이 나오고 다음 해 2권도 출간되었다. 회화계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수식어가 붙은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2015년 현재도 계속 새로운 쇄를 찍어내고 있다. 오주석 선생계급작스레 생을 마감하신 것이 미술계의 대중화에도 참 안타까운 사건인 듯하다.
저자가 옛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중생들을 위해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엄선한 작품 리스트를 기대하며 차례를 열어본다.
차례
1. 호방한 선속의 선, 김명국의 <달마상> + 옛 그림의 색채
2. 잔잔하게 번지는 삼매경,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3. 꿈길을 따라서, 안견의 <몽유도원도> + 옛 그림의 원근법
4. 미완의 비장미, 윤두서의 <자화상>
5. 음악과 문학의 만남,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 옛 그림의 여백
6. 군자의 큰 기쁨, 윤두서의 <진단타려도>
7. 추운 시절의 그림, 김정희의 <세한도> + 옛 그림 읽기
7. 추운 시절의 그림, 김정희의 <세한도> + 옛 그림 읽기
8. 누가 누가 이기나, 김시의 <동자견려도>
9. 들썩거리는 서민의 신명, 김홍도의 <씨름>과 <무동> + 옛 그림 보는 법
10. 올곧은 선비의 자화상, 이인상의 <설송도>
11. 노시인의 초상화, 정선의 <인왕제색도> + 옛 그림에 깃든 마음
이인상 <설송도> 종이에 수묵, 117.4x52.7cm 국립중앙박물관
책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걸작 회화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읽다보면 저자가 개인적으로 특히 애정을 느꼈던 작품들임이 글 속에 드러난다. 또, 한국의 수묵화들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좋은 작품들을 고심 끝에 골라낸 흔적이 역력하다. 어떻게 하면 옛 그림을 보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쉬운 길로 안내할까 하는 고민에서 책을 시작하신 것이다.
옛 그림을 보는 법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감히 옛 그림의 감상 요령을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가장 커다란 두 가지 원칙이 있으니 그것은 ‘옛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옛사람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감상 요령의 첫째는 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자주 보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접근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감상자 개개인의 체험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pp.211-212)
아. 책으로 공부할 것이 아니라 한번이라도 그림을 더 보고, 손 닿는 곳에 도록을 두고 보고 해야되는 것이었나 잠시 생각해 본다. 하지만 저자는 다음처럼도 얘기한다.
“..둘째, 작품 내용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뜯어본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보았지만 못 보았고 들었지만 못 들었다’는 정황이 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주의 깊게 살펴본 사람이 감탄해 마지않는 작품도 건성으로 그저 휙 지나쳐 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마련이다.”(p.213)
바로 그렇다. 내가 이제껏 많은 작품들을 그렇게 슬렁슬렁 봐온 거란 말이다.... 그 형이하학적 감상 레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작품을 샅샅이 뜯어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 동양철학이나 그 안에 담긴 시, 고사를 모르는 채로 자신만의 해석으로 보면 자기만족은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물론 미리 공부하거나 설명만 듣고 그림은 설명을 확인만 하는 식으로 감상하는 수많은 미술관 관객들을 보면 이건 아니다 싶기는 하다. 그러나 그림은 그림 혼자만 존재할 수는 없다. 서양 현대미술도 그 맥락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전통 회화의 깊은 정신세계를 몇 그램 무게의 종이와 먹으로 구성된 시각적 미로만 감상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그림을 소개함에 있어서 저자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나 관계된 고사, 동양철학, 작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에피소드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며 “이렇게 흥미로운 게 한국미술이다”라고 주장한다. 다소 어려운 내용이 필요할 것 같은 부분은 설명을 참고 멈춘 느낌도 든다. 서술에 있어서도 미술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였을 때 난해하지는 않다. 동양철학이나 인문학적인 지식이 없다고 생각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쫓아갈 수 있다.
김홍도의 <주상관매도>에 대한 글쓴이의 설명을 옮겨 본다.
“뿌옇게 떠오르는 끝없는 빈 공간, 그 한중간에 가파른 절벽 위로 몇 그루 꽃나무가 안개 속에 슬쩍 얼비친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는 이편 산자락의 끄트머리가 꼬리를 드리웠는데 그 뒤로 잠시 멈춘 조각배 안에는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하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치켜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보인다.”(p.123)
김홍도 <주상관매도> 종이에 수묵담채, 164x76cm 개인
다른 출판물이나 신문 등에서 그림에 대한 소개로서 또 그림을 읽어가는 과정으로서 화면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들을 종종 대하게 되는데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감상에 흘러 유치하거나 중언부언하게 될 수도 있고, 어느 모양새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해 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분은 참 딱 맞는 어휘를 써서 딱 적절하게 너무 딱딱하지도 너무 감상적으로 흐르지도 않게 서술을 하고 계시다. 물론 요즘 아이들이 읽기에는 다소 예스러운 어휘들이 섞이는 부분도 눈에 많이 띈다. 하지만 아름다운 한글을 최대로 활용하고 많이 다듬은 매끄러운 글이다. 비평문도 문학이라더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글을 따라가며 계속 페이지를 앞뒤로 넘겨 작품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이 만들어내는 어떤 장(field)안에 빠져들어간 개인적 경험을 서술한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동의할 수는 있게끔, 이런 자아 성찰의 세계를 엿본 독자는 자신도 그 그림 앞에 서서 간접적으로 경험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거울 속의 한 남자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눈빛은 전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그는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나는, 이를테면 그림 속의 윤두서와 그것을 그리는 또 하나의 윤두서, 그 두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나는 용케 두 사람의 내밀한 대화 사이로 숨어들어 몰래 엿보기는 하지만 끝끝내 두 사람간의 침묵의 대화 속에 끼어들 수가 없다. 그려진 윤두서의 고요함 속으로도, 그린 윤두서의 강한 의지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윤두서가 나지막이 윤두서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누구인가, 네가 나인가, 너는 도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pp.98-99)
윤두서 <자화상> 종이에 수묵담채, 38.5x20.5cm 국보240호 개인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지내다가 한밤중에 이 글을 읽고 그 그림을 본다. 나는 누군가. 이 분은 어떤 생각이셨을까. 가족과 지인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상태에서 나를 정면으로 돌아볼 때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메마른 내 가슴에도 눈물이 찔끔 흘렀다. 서양의 유명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경험을 한다는 친구들은 종종 봤지만 한국의 옛 그림에서 그랬다는 사람들 얘기는 거의 못 들어 봤다. 왜 그렇게 됐을까. 우리 세대, 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옛 사람의 정서적 산물과의 공감을 위한 무언가가 유실된 것이다.
옛 그림이 우리에게 어려운 이유는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던 상식과 맥락이 우리에게는 없다. 일부러라도 스토리를 만들어 조상들이 물려준 물건이나 작품의 가치를 높이고 포장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하는 노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 같다.
그런 이해로 가는 길에 장애물이라고 한다면 ‘시대에 대한 이해’와 ‘한자/한문’ 그 양대 산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감성과 옛 정서간의 연결고리는 그 다음 문제 아닐까도 싶다. 일단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니니 이 문제는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다음 책을 찾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