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것은 아닌 모양이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여전히 배상과 약탈문화재 반환 등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나라도 위안부 문제나 약탈당한 문화재나 예술품반환문제도 그렇고. 최근 법원 판결로 난감한 지경에 빠진 서산 부석사 불상도 고려시대에 빼앗기고 그것을 최근 다시 훔쳐 국내로 반입한 탓에 소유권을 두고 국제적인 분쟁으로 이어질 조짐이다. 전후 독일로부터 약탈문화재를 반환받은 프랑스는 여전히 자신들이 약탈해온 아프리카나 아시아국가의 유물 특히 우리나라의 직지나 외규장각 의궤 등은 여전히 반환하지 않고 있다. 미국도 독일도 영국도 일본도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
전쟁은 인명을 살상하는 것 뿐 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삶의 흔적인 문화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더럽지 않은 전쟁은 없다. 하지만 이런 비인간적이며 처참한 전쟁 중에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자 삶의 기록인 문화재, 미술품을 지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유럽의 문화재와 미술품들을 모아 린츠(Linz)에 총통박물관(Führermuseum)을 세울 계획을 세우고 닥치는 대로 새로운 도시를 점령 할 때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예술품 약탈에 열을 올렸다. 그는 당시 드레스덴 미술관장이었던 한스 포세(Hans Posse, 1879~1942)에게 명령하여 세계 최고의 예술품들을 수집하여 독일 아리아인종의 우수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독일의 유럽 제패를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부드럽게 미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과 전략을 수립해 시행했다.
히틀러의 약탈로 액자만 남은 루브르
그리고 이런 예술품 약탈을 위해 그는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1893~1946)과 협의하여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에게 명령해 ‘엘른자츠타프’ (Elnsatzstab)라는 특수부대를 만들고 점령하는 나라의 주요 예술품을 약탈, 수집하도록 했다. 또 프랑스 예술품 약탈을 위해 전국특별참모부(ERR)를 설립하여 책임지고 점령 국가들에 소장되어 있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구입하기도 하였다. 당시 예술품 구입에 사용된 예산은 7,000만 마르크로 8,000여 점의 작품을 구입했다. 패망의 위기인 1944년에도 예술품 구입 예산은 되레 늘어날 정도였으니 이는 히틀러의 예술품 수집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예술품에 대한 집착은 아마도 화가가 되기 위해 비엔나미술학교에 도전했으나 수차례 떨어져서 화가의 길을 접어야 했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유럽에서 위세를 떨칠 당시 특히 유대인들의 소장품을 모두 압수하여 보관하도록 지시했다. 따라서 가장 규모가 큰 약탈은 유대인 명문가인 로스차일드 가(Rothschild Family)와 레더러 가(Lederer Family)등이 소장했던 예술품 3만 5000여점일 것이다. 이때 약탈당한 예술품들도 남부 오스트리아 가밍(Gaming)의 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어 전쟁의 포화를 피할 수 있었고 이후 나치 패망과 더불어 압수 예술품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정부에 귀속되었다.
연합군의 전세가 밀리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는데 무슨 예술품이고, 문화재 보호라는 한가한 소리를 하냐는 여론과 전쟁으로 인해 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최대한 전쟁으로 인한 문화재 파괴와 멸실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전장에서의 사치-예술품을 구해라
이렇게 유럽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겨울,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미 전역의 미술관, 박물관 관장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박물관학에서 강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하버드 대학 포그 미술관(Fogg Museum) 부관장 폴 색스(Paul Joseph Sachs,1878~1965)는 그들 앞에서 유리 파편이 가득한 테이트 미술관, 둘둘 말려있는 렘브란트의 '야간순찰', 텅 빈 루브르미술관의 대 전시실들을 보여주면서 “박물관과 미술관은 평화 시에도 지역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또한 전쟁 시에는 그 존재가 두 배로 중요해진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찮고 사소한 것은 떨어져 나가고 궁극적이며 지속적인 가치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인류의 예술사, 미술의 역사를 지켜나갈 ‘특수 기술자’들을 선발해 군에 보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영국은 최전선에 있는 문화재와 예술품 보호를 위한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계획했고, 미국도 곧 움직였다. 이미 군인으로 복무 중이던 박물관의 전문직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안을 모색했고 이런 분위기속에서 1943년 모뉴먼츠 맨(Monuments Men, MFAA:The Monuments, Fine Arts, and Archives section)이 조직됐다. 그리고 이들에게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Dwight D. Eisenhower,1890~1969)은 유럽 북부전선으로 떠나면서 “전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역사적 기념물과 문화 중심지를 맞닥트릴 텐데 그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가 싸우는 것”이라고 명령하면서 더욱 본격화하였다.
왼쪽부터 브래들리, 패튼, 아이젠하워. 나치가 약탈해 소금광산에 은닉한 그림들을 돌아보고 있다. 1945년.
미국 유수의 문화기관인 국립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등 기관에 근무하는 전문가 등 13개국에서 모인 약 350~400 여 명에 이르는 봉사단과 민간인 단체가 전쟁으로부터 문화재, 미술품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와 협력하는 한편 그 스스로가 전장에 나가 문화재들을 지키고 회수하는 일에 나섰다. 이 특수부대가 바로 오늘날 모뉴먼츠 맨 파운데이션(The Monuments Men Foundation)으로 남아 문화재 예술품의 보존과 파괴를 막는 임무를 수행하는 ‘모뉴먼츠 맨’이다.
특히 1944년 2월 15일, 이탈리아 로마 남부에 자리한 침략자 나치의 소굴이자 상징으로 여겨졌던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베네딕트수도회가 탄생한 곳으로 1000년 동안 성스러운 영혼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연합군은 할 수 없이 이 수도원을 폭격하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를 보존해야한다는 여론은 더더욱 거세게 일었고, 단순하게 문화재보존과 예술품 보호에 국한했던 임무가 빼앗기고 약탈당한 예술품들을 찾아 원상회복시키는 일까지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순간에 결정되는 전쟁터에서 문화재를 지키고 예술품을 보호하라는 명령은 사치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예술품까지 지키라고 말하는 모뉴먼츠 맨들의 목소리는 전장에서 묻히기 일쑤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활약상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44년부터 1951년까지 활약한 모뉴먼츠 맨은 대부분 건축가, 박물관 관장, 큐레이터 등 전문 분야의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발대 초기에는 중요한 건축물의 피해를 막는 게 주요 임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히틀러와 나치가 약탈해서 은닉한 미술품등 문화유산 500만 점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특정부대에 배속되어 활동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군번 없는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 성스러운 문화적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튼 이들은 작품을 찾아 분류하고 추적해서 원 소장가들의 나라로 돌려주는 역할까지 수행해야했기 때문에 이 부대는 전쟁이 끝나고도 6년을 더 유럽에 머물면서 이 일을 해내어야만 했다.
미켈란젤로 <성 모자상> 1501-1504, 대리석, 높이 200cm, 성모성당, 브뤼헤
반 아이크 <신비한 어린 양의 제단화- 펼친 제단화> 1426-32년경, 목판에 유화, 461X350cm, 성 바보성당, 겐트 벨기에
모뉴먼츠맨에 의해 발견된 작품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벨기에의 브뤼헤(Brugge)의 노틀담 성당에 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성 모자 상’(Madona and Child)과 겐트(Gent)의 세인트 바프(St. Bavo of Ghent)대성당에 있는 반 아이크 형제(Van Eyck)가 그린 ‘겐트 제단화’(The Ghent Altarpiece 1426~32 나무판에 유화 461x361cm) 등이 있다. 히틀러는 약탈해 온 문화재들을 오스트리아 알타우제(Altaussee) 소금 광산과 노이슈반슈타인 성(Neuschwanstein Castle)등 약 1000여 개의 장소에 숨겨놓았었다. 영화 <모뉴먼츠 맨-세기의 작전>(The Monuments Men, 2014)은 바로 이들 MFAA 요원들이 전쟁 중에 알타우제 소금광산과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예술품들을 찾아내 반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독일 소금광산에서 회수된 히틀러가 약탈해갔던 마네의 그림
알타우제의 광산에는 6500여 점의 그림과 1200여 개의 공예품이 발견되었다. 이 거대한 예술품 수장고는 1945년 3월 19일 히틀러가 내린 “모든 군사, 공업, 운수, 통신시설과 아울러 독일 국내의 모든 점포를, 적군에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모두 파괴해버리라”는 ‘네로명령’(Nero Decree)에 의해 사라질 운명이었다. 이즈음 타결된 얄타회담 결과로, 소련이 점령하기로 되어있던 이곳에 은닉되었던 예술품들을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발견해 피난시켰으며, 이는 오늘의 박물관 수십 개를 지켜낸 것과 같은 성과였다. 당시 소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2천만에 가까운 병사들의 희생에 대한 복수와 독일군이 약탈해간 예술품들을 되 찾아온다는 명분으로 유럽의 문화재와 예술품을 약탈해가는 ‘전리품여단’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활약은 더욱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예술품을 옮기는 작업은 긴박하지만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부대원들이 전문성을 살려 우선순위를 정해 반출을 하기로 했다. ‘성 모자 상’은 독일군의 양가죽 코트를 ‘입고’ 도르래를 타고 실려 나왔고 여러 개의 폭으로 구성된 ‘겐트 제단화’는 각각의 패널을 분리해 가지고 나온다.
영화 중에서 대원들이 <성 모자상>을 반출하려는 장면
연합군을 따라 막상 독일에 들어가 보니 많은 독일 예술품들이 또 전쟁의 희생양이 될 형편이었다. 모뉴먼츠 맨들은 프랑스, 벨기에 등 독일 점령지 예술품 보호도 중요하지만 독일의 예술품도 ‘인류의 자산’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들은 문명을 보호한다는 명분과 자부심으로 “지구상에서 없애기엔 너무나 우아한” 그리고 “설령 적의 것이라 하더라도, 위대한 것은 위대하다”는 생각에서 독일의 예술품들도 보호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