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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드워드 호퍼와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Shirley-Visions of Reality>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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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0. 열 번째 작품은 <햇빛 속의 여성>(A Woman in the Sun)으로 이어진다. 독백처럼 신마다 등장하는 도입부의 뉴스는 와그너 시장이 선거운동을 시작하고, 케네디가 조용한 휴가를 다녀왔으며, 쿠바에서는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공장가동이 중단되었으며 이는 제국주의 때문이라고 비난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햇빛 속의 여성> A Woman in the Sun, 1961, 유화, 101.9× 155.6cm, 휘트니 미술관


 셜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창밖을 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그림제목으로 보아서는 앞 그림에 이어 플라톤의 ‘태양의 비유’라도 나올 듯 하지만 호퍼는 우리가 손에 잡힐 듯 그림 속에서 모델을 세워두지만 태양이라는 빛을 통해 동시에 멀리 밀어낸다. 그 간격은 매우 미묘해서 인생과 예술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보여준다. 이 차이를 깨달으면서 예술가의 역할을 관객들은 관음증적 시각이 아닌 예술가의 작업에 동조하는 증인의 역할을 부여하면서 관객들은 자유를 느낀다. 그림을 보면 인물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닥의 밝은 사각형의 빛으로 우리의 눈을 매료시킨다. 그리하여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관객들은 자기성찰의 지점으로 스스로를 끌어내린다. 그림의 제목으로만 봐서는 앞 장면의 ‘동굴의 비유’에 이어 ‘태양의 비유’라도 나올 법 하지만 스티브가 병원에서 무언가 안 좋은 일, 즉 죽음 같은 것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신 11. 다음 타블로 비방은 <휴식>(Intermission)이다. 이 신은 1863년 8월 28일로 미국의 워싱턴 대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1929~1968)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날이기도 하다. 뉴스에서는 덴마크인과 체코 난민을 태운 트럭이 오스트리아 국경의 철문을 뚫고 들어왔다는 소식과 2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인종갈등으로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을 전한다.  


<휴식> Intermission, 1963, 유화, 101.6x152.4cm, 개인


 셜리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기억에 관한 영화다. 대사로 보아 앙리 콜피(Henri Colpi, 1921~2006)의 영화 <너무나도 긴 부재>(Une aussi lonnue absence, 1961)>라는 영화로 보인다. 파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테레즈에게 2차 세계대전에 출병했다 실종된 남편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나타난다. 이미 시간이 흘러 남편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즈음 나타난 그 남자를 보며 남편이 살아 돌아왔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는 기억상실증으로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기억을 살리려 여 주인공이 애를 쓰는 그런 내용의 영화다.  
 중간 휴식시간에 잠간 스티브가 나타나는데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을 때 이미 그는 없다. 잊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잊혀 지면 어떻게 하냐고 조바심하는 셜리의 애절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신 12. 다른 신은 적어도 1년 또는 10년을 훌쩍 뛰어넘지만 이번 신은 전신의 다음 날인 1963년 8월 29일이다. 배경은 <빈 방의 햇빛>(Sun in an Empty Room)이다. 호퍼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빛을 물질적인 대상의 하나로 간주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빈방과 빛 그리고 그 둘이 만나 형성하는 빛의 대비와 긴장이 가득하다. 절제와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그림을 대한 그는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데 이런 작품의 경우 사실적인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추상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빈 방의 햇빛> Sun in an Empty Room, 1963, 73×100.3 cm, 개인


 셜리는 빈방에 라디오를 들고 들어온다. 라디오에서는 60년대 대표적인 저항가요인 조안 바에즈(Joan Baez, 1941~ )의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 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링컨 기념관 앞에서 한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가 흘러나온다. 

  진보적인 가치를 표현하고 절실하게 주장했던 극단 그룹 씨어터와 리빙 시어터의 단원이었던 셜리에게 조안 바에즈의 노래와 루터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세월에 밀려 각박한 한 세상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가슴속에 새겼던 가치가 세상에 터져 나오는 그 순간은 감격스러웠다.   그래서 스스로 독백을 늘어놓는다. “좋은 경험이었어, 25만 명 앞에서 노래하다니...”라며. 이는 그녀도 그 행진에 함께 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미국의 척박한 예술적 환경을 등지고 유럽으로 근거를 옮기려는 극단을 따라가야 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한다.  

#신 13. 영화는 드디어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배경이 되었던 <객실>(Chair Car, 1965)로 돌아가 첫 장면은 셜리가 읽고 있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표지에 있는 호퍼의 또 다른 그림을 줌인하면서 시작된다. 객실의 승객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에 몰두해 있는 듯하다. 아마도 셜리는 리빙시어터와 함께 이탈리아 음악가 루이지 노노(Luigi Nono, 1924~1990)가 베트콩에게 바치는 작품으로 미 제국주의를 비판한 <숲은 젊고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A floresta e jovem e cheja de vida, 1966)라는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일 터이다. 그의 차안에서 “기차 여행을 하면서 꿈속에 사는 것처럼 경계를 넘나들 것이다. 과거는 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꿈에선 태양을 볼 수 없지만 밝고 먼빛은 인식할 수 있다. 다른 승객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꿈을 공유한다. 가깝고도 먼 꿈...”이라고 읊조리는 독백처럼 영화의 주제는 호퍼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기차는 점차 속도를 내면서 빛에 스쳐지나가는 차창의 그림자와 점점 화면 밖으로 빠져나가는 셜리의 발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감독은 호퍼의 그림을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명확하게 전한다. 게다가 영화는 193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는 미국의 현대사와 정치, 문화, 사회사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와 문화예술에서의 진보적인 경향성 그리고 당시 활동했던 작가와 연극인, 영화인, 가수 그리고 철학에 이르기까지 교양을 갖추지 않으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일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다 녹기 전에 생의 아이스크림을 즐기라”는 에피쿠로스적인 세계관이나 플라톤의 ‘이데아론’ 같은 사변적인 철학도 셜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에게 다가간다. 이는 다분히 이론적인 책 속의 철학이 아니라 삶 속에서 묻어나오는 철학이다. 아름다움과 불안이 공존하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호퍼의 그림을 빌어 더더욱 영화와 회화의 간격을 모호하게 한다. 아니 회화와 영화가 공존하는 새로운 장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30여년의 격동기라는 시간을 두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 특히 세상의 변화와 이에 반응하는 개인의 삶 또는 개인의 삶과는 관계없이 흘러가는 역사라는 커다란 강이 개인의 삶과 힘없는 일상의 편린들에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호퍼의 그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배우의 연기와 최소한의 음향과 대사를 통해 호퍼를 시뮬라크르(Simulacre)로 만들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원형인 이데아, 복제물인 현실, 복제의 복제물인 시뮬라크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현실은 인간의 삶 자체가 복제물이고, 시뮬라크르는 복제물을 다시 복제한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복제란 불가능하다. 
 외양은 복제가 가능하지만 내면의 느낌이나 생각 특히 순간적인 것들은 복제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복제가 거듭될수록 실재 즉 진짜 또는 이데아의 세계와는 멀어진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시뮬라크르를 한 순간도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실재할 수 없거나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1995)의 세상의 모든 사건, 지속성과 역사적인 큰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크고 작은 소소한 하지만 인간의 삶에 변화와 의미를 줄 수 있는 각각의 사건을 시뮬라크로로 규정하고 이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들뢰즈는 이를 ‘사건의 존재론’으로 설명하는데, 이 영화는 과연 플라톤의 시뮬라크르일까 아니면 들뢰즈의 그것일까. 아무튼 영화제목 ‘실재의 상상’(visions of reality)은 많은 것을 상상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머뭇거리게 한다. (*)



글/ 정준모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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