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정준모(문화정책, 인디펜던트 큐레이터)
요즘 들어 미국이 경제위기에 일자리가 줄어들어 죽을 맛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국은 실제로 그렇던 안 그렇던 간에 세계 최강대국이며, 지구상의 경찰인 동시에 누구에게나 풍요로운 삶을 안겨 줄 것 같은 엘도라도 같은 아메리카 드림을 실현시켜 줄 땅이다.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을 것 같은 미국이지만 그곳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보면 왜 소외받은 사람, 가난한 사람, 학대받는 사람, 삶에 지친 사람, 병든 사람들이 없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문명국처럼 행세하는 미국에는 여전히 흑백 인종 갈등이 존재하고,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잠식한다고 아우성치는 기층민중이 있고, 여성비하가 존재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여전한 ‘정글’이다.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을 것 같은 미국이지만 그곳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보면 왜 소외받은 사람, 가난한 사람, 학대받는 사람, 삶에 지친 사람, 병든 사람들이 없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문명국처럼 행세하는 미국에는 여전히 흑백 인종 갈등이 존재하고,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잠식한다고 아우성치는 기층민중이 있고, 여성비하가 존재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여전한 ‘정글’이다.
이런 미국이라는 아니 세상이라는 ‘정글’에서 소외받은 또는 스스로 소외된 사람들을 그린 영화가 바로 '셜리에 관한 모든 것'(Shirley-Visions of Reality, 2013)이다. 영화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그림이 배경이 된다. 아니 어쩌면 소위 ‘군중속의 고독’, ‘산업시대에 소외된 삶’의 모습을 작품으로 담아낸 호퍼의 모티브를 빌어 온 호퍼에 대한 오마주(homage)같은 영화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 자화상 1930
영화는 철저하게 주인공 셜리(스테파니 커밍분, Stephanie Cumming, 1990~ )의 독백으로 이어간다. 연극배우로 살아가는 셜리가 애니메이션영화의 주인공처럼 호퍼의 그림 13점을 연극의 세트로 삼아 그것을 배경으로 ‘살아있는 그림’(tableau vivant)처럼 그림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 나간다. 따블로 비방 기법은 명화나 역사적인 사건을 재현하는 연출방식으로 캐나다 출신의 사진작가 제프 월(Jeff Wall,1946~ )가 즐겨 사용하는 ‘시네마토그래피’(cinematography)와 같은 방식이다. 이는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찍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미리 계산되고 연출된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점에서 보통의 사진과는 다르다. 그는 영화감독처럼 촬영 장소를 미리 정하고 무대를 꾸민 후, 배우들에게 대본을 나누어 주고 조명과 카메라의 위치를 정해 어떤 스토리의 장면을 찍을 것인지, 어떤 효과를 줄 것인지 치밀하게 계산을 해서 촬영을 진행한다. 영화도 호퍼의 그림을 무대로 배우들이 그 역할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제프 월의 그것과 같지만 영화라는 형식에서 다르다.
에드워드 호퍼 Western Motel Oil on canvas, 77.8 x 128.3 cm, 1957
영화 '셜리의 모든 것'의 한 장면
그래서 사실 여느 미술관에서 만나게 되는 조금 긴 비디오 아트 같은 영화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사실 이 영화를 만든 구스타프 도이치(Gustav Deutsch, 1952~ )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으로 원래 건축을 공부하고 미술로 전향해 영화감독과 비디오, 설치미술 등의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긴 아티스트이다. 그와 함께 호퍼의 빛이 넘쳐나는 그림을 명확하게 순간으로 정지시켜 잡아내는 촬영감독 제르지 팔라즈 (Jerzy Palacz)의 도움으로 빛이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무력한 일상으로 만들어가는 호퍼 그림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특히 도이치 감독은 정지된 듯 한 호퍼의 그림에서 보이는 주인공들이 망연자실 창밖을 내다보거나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는데 그 전후의 반응과 장면을 상상해 보기위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가장 미국적인 그림을 오스트리아 사람이 주제로 삼아 그것을 소재로, 배경으로 만들어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기도 하지만 소외받은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야 말로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미국의 미술이 20세기 세계미술의 주류로 성장했지만 미술사를 살펴보면 초기 미국 미술은 유럽 식민지 미술이나 다름없었다. 식민지 시절 그리고 1776년 독립과 이후 1800년대 전반, 미국의 건설기를 맞아 정치,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예술도 전환기를 맞았다. 건축가 출신인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의 연방 양식은 공공건축의 전범이 되었고 미술에서는 낭만주의가 주를 이루며 미국의 대자연을 그렸다. 특히 허드슨강파(Hudson River School)의 토머스 콜(Thomas Cole, 1801~1848)과 영적인 풍경화를 그린 조지 이네스(George Inness,1825~1894), 소박한 양식의 에드워드 힉스(Edward Hicks,1780~1849), 중서부지방의 서민생활을 그린 조지 빙햄(George Caleb Bingham, 1811~1879)등은 미국 사실주의회화의 근간이 되었다.
Thomas Cole The Voyage of Life Childhood 1842
남북전쟁이 끝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자본주의화,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미술은 혼란기를 맞았다. 유럽에서 인상파로 활동했던 J.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 1834~1903)나 M.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 1844~1926)가 있었지만 이들을 미국화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호퍼의 사실주의는 미국의 초기 사실주의의 중심이었던 프레드릭 에드윈 처치(Frederic Edwin Church,1826~1900)나 에이킨스(Eakins, Thomas, 1844~1916), 낭만주의적인 풍속화를 그린 W.호머(Winslow Homer,1836~1910), 신비주의적인 그림을 그린 A.라이더(Albert Pinkham Ryder, 1847~1917)등으로 이어진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Thomas Eakins Mending the Net 1881
하지만 20세기로 들어서면 미국의 회화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갈래지어진다. 미국의 20세기 미술은 전통에 대한 혁명의 연속이었다. 로버트 헨리(Robert Henri, 1865~ 1929)는 “모든 예술적 가치를 지옥에 보내버리자”라는 과격한 구호와 함께 1908년 뉴욕의 사실주의화가들로 구성된 '디 에이트 그룹(The Eight)'을 결성해서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상징주의와 추상미술에 대항했다. 그들은 도시변두리나 서민들의 삶을 묘사했다. 이런 사실주의 화가로는 글래큰스(William J. Glackens, 1870~1938), 슬론(John Sloan, 1871~1951), 룩스(George Luks,1867~1933)와 쉰(Everett Shinn, 1876~1953)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신문 삽화를 그리던 이들이었는데 점점 사회적인 관심보다는 변화로 가득 찬 아름다운 당시의 뉴욕 정경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William Glackens Christmas Shoppers, Madison Square, 1912 Crayon and watercolor on paper
한편 사진가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 1946)는 사진 분리파 운동(Photo-Secession Group)을 통해 회화주의 사진의 반대 입장에서 사진기와 렌즈만이 지닌 정밀하고 정확한 기능의 목적을 부활시켰고, 스트레이트 포토그라피(Straight Photography)와 스냅 쇼트(Snap Shot)를 이용해 사실주의에 기초한 사진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렇게 사실주의가 세를 불려갈 즈음 마티스의 색채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알프레드 헨리 모러(Alfred Maurer,1868~1932), 존 마린(John Marin,1870~1953), 막스 웨버(Max Weber, 1881~1961), 마스던 하틀리(Marsden Hartley,1877~1943), 아서 도브(Arthur Dove,1880~ 1946),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 프렌더개스트(Maurice Prendergast, 1858~1924)등 모더니즘에 경도된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13년 미국화가 조각가협회가 뉴욕 렉싱턴가 26블럭의 제 69연대 병기고로 사용되던 건물을 빌어 <국제 현대 미술전>(The International Exhibition of Modern Art, 1913. 2.17~3.15)을 개최하면서 변화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약 1000여점의 미국 미술과 앵그르, 들라크루아로부터 포비즘, 큐비즘에 이르는 500여점의 유럽미술이 전시되어 사실주의가 주를 이루고 모더니즘이 막 싹을 틔우려던 미국미술의 발화를 자극했다. 특히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보스턴과 시카고를 순회했는데 대중들에게 보다는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Duchamp, Nude Descending a Staircase
1차 세계대전(1914~1918)중에 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아모리쇼나 파리파의 영향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미술운동의 바람이 크게 불어오기시작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지역주의미술(Regionalism)이라고 명명되는 사실주의 작가들도 미국의 교외와 지역의 정경들로 자신들의 세계를 새롭게 넓게 정립해 나갔다.
특히 1930년대 미국을 강타한 경제대공황은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사실주의 회화가 등장하고, 예술가들을 구제하려는 시책의 하나로 연방미술계획의 벽화운동이 시행되면서 사회문제를 초현실주의 양식을 빌어 제작되는 작품들이 나타났다,
이즈음 ‘미국식 고딕’(American Gothic)을 완성한 그랜트 우드(Grant Wood,1892~1942)와 T.벤튼(Thomas Hart Benton, 1889~1975)은 지방에서 전통적이고 소박한 사실주의의 수법으로 지방 사회의 문제를 양식화된 화면으로 표현했다. 사회비판적 화풍을 전개한 벤 샨(Ben Shahn,1898~ 1969)은 경제공황기 도시 빈민과 민중의 억눌린 삶과 빈곤 속에 방치된 어린이를 그려 삶의 고통과 슬픔을 그렸으며, 일반서민이나 하층 젊은이들을 주로 하여 풍자화를 그린 레지널드 마시(Reginald Marsh,1898~1954), 도시풍의 모던 걸들을 주로 그린 가이 페네 드 부아(Guy Pène du Bois,1884~1958), 찰스 실러(Charles Sheeler,1883~1965)는 찰스 데무스(Charles Demuth, 1883~1935)와 랄 스톤 크라포드(Ralston Crawford,1906~1978)등과 같이 매우 정교한 입체주의 화풍을 전개했고 로버트 헨리를 사사한 에드워드 호퍼도 자신만의 빛과 형태에 집중하는 평면적인 사실주의적 화풍을 완성해 나갔다.
Ben Shah Liberation, 1945
호퍼는 미국의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들은 산업화와 제1차 세계대전, 경제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감독은 이런 호퍼의 그림을 빌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기도 하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미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주제로 다룬다. 약 30년간의 미국역사를 대별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열 두 해의 사건들 즉 경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50년대 미국을 강타한 매카시즘 광풍, 60년대 워싱턴의 인종문제, 인권문제와 함께 6.25전쟁 등 주요한 사건들이 연대기적으로 이어져 나온다.
해가 바뀌면 다음 사건으로 바뀌면서 암전이 오고 라디오 뉴스로 그해 어느 날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이 전해진 다음 호퍼의 그림이 세트처럼 화면에 전개된다. 여기서 셜리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인 동시에 그의 남자친구 스티브(크리스토프 바흐(Christoph Bach, 1975~ ) 분)와 함께 장강을 이루며 급류처럼 흘러가는 요동치는 세상과는 짐짓 관계없는 듯 무심한 개인의 일상을 단편처럼,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처럼 이어간다. 따라서 약 90분 정도의 상영시간 동안 전체 등장인물이 10여 명에 불과한데 이들은 대사도 거의 없이 영화의 일부를 이룬다. 주인공은 당시 진보적인 연극단체 <그룹 씨어터>의 일원으로 거시사적인 역사에서 미시사적 존재인 개인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역사와 거대한 세상의 흐름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 또는 존재라는 점에서 호퍼의 그림과 꼭 닮아있다. (계속)
에드워드 호퍼 Morning Sun oil on canvas, 71.4 x 101.9cm, 1952.
영화 '셜리의 모든 것'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