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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에 선 그림, 클림트의 아델레 바우어의 초상 <우먼 인 골드(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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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마리아가 그림을 찾는 과정은 영국 BBC방송의 이매진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하나인 <클림트 훔치기>(Stealing Klimt)라는 제목으로 2007년 방영되었고 이를 보던 영화감독 사이먼 커티스(Simon Curtis, 1960~ )는 영화로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동시대의 미국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다.”는 내용에 이끌렸다고 한다. 
 영화는 법정드라마 형식을 띠고 있지만 클림트의 작가로서의 가치와 그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아델레와의 관계를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기말,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세기말적 현상 즉 염세와 우울 그리고 불안이라는 것들이 삶을 어떻게 지배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비엔나의 사교계 중심이었던 아델레가 클림트가 서로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남편이 클림트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부탁한 1899년경이라 한다. 그리고 이후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  


<클림트 훔치기>의 한 장면


 사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클림트가 죽고 나서 14명의 아이들이 나타나 그의 자식이라고 주장할 만큼 바람둥이였다. 하지만 그가 모든 여성들과 몸을 섞는 그런 류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인 사랑(Platonic love)과 육체적인 관계(Erotic Love)를 분명하게 구분지어 여성들을 만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는 널리 알려진 두 여성이 있었는데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눈 이는 패션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ege, 1874~1952)이다. 클림트보다 열 두 살이나 연하인 그녀는 남동생의 처제였다. 글쓰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던 클림트가 400여 통의 편지를 쓸 만큼 좋아했으며 뇌졸중으로 쓰러져서도 그를 찾을 정도로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냈다.


Gustav Klimt, Emilie Floege, 1902


에밀리 플뢰게


클림트의 임종을 지키고 재산을 정리해 클림트의 아이들과 아이엄마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에로틱한 사랑의 대상은 클림트의 아이를 둘 또는 셋 낳은 여성으로 알려진 짐머만(Zimmermann,1879~1975)이 있다. 유대인으로 가구공의 딸로 태어난 그는 19살에 클림트의 모델이 되었고 둘째 아들을 낳은 후 건강이 악화되어 10여 년간 멀리 휴양지에 가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클림트와 멀어졌다.


짐머만


아델레는 플라토닉 한 연인인 동시에 에로틱한 사랑의 상대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초상화를 주문하고 그 모델을 서기위해 만났던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한 것이다. 클림트의 대표작인 1901년 작품인 <유디트와 호르페르네스>의 모델도 아델레이다. 


<유디트와 호르페르네스> 1901년, 유화, 84×42cm, 벨베데레미술관

 이 작품은 클림트의 장식성과 퇴폐성, 평면적인 화면이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한쪽 가슴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나른하고 몽환적인 상태의 선정적인 모습은 마치 귀접몽을 통해 성적 황홀경에 이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원래 제목을 유디트라 했지만 헤롯왕을 유혹해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른 ‘살로메’(Salome)처럼 그려져서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살로메>라고 불렀다. 그래서 당시 누가 이렇게 선정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었을까 궁금해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모델이 아델레라는 사실은 <초상Ⅰ>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독특한 목길이에 맞추어 제작한 초커(choker)목걸이가 아델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초상 1


 인간의 사랑과 성,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무늬와 장식적인 기호들로 표현한 클림트는 한 사람을 위해 2장의 초상화를 그려준 예가 없지만 아델레를 위해서는 2점의 대작을 제작했다. 사실 그림을 보면 아델레의 모습보다는 주변의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화면이 추상화처럼 보이는 작품에 아델레의 특징을 담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림에서 왼손으로 오른 손을 감싸고 있는 것도 아델레가 어렸을 적, 손가락을 다쳐 이를 가려주고자 하는 배려였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초상 Ⅱ>는 Ⅰ에 비하면 매우 소박하다. 전혀 다른 사람이 그린 것처럼 분위기가 다른 이 그림에서는 다양한 색채와 동양적인 문양이 나타나고 그림 윗 부분의 배경에는 동양의 ‘기마도’ 같은 그림이 보이기도 한다. 클림트는 동양취미를 가지고 있어 한국과 중국 일본의 자기나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체코의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이름 없는 가난한 금 세공사이며 판화가인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지만 일곱이나 되는 자식 때문에 꿈을 포기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3남 4녀중 둘째로 태어난 클림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하고 소질도 보였으나 가난한 형편 때문에 그림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14살이 되던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Kunstgewerbeschule)에서 입학해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는 1907과 1908년에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응시했다 두 번이나 떨어진 학교이기도하다. 1883년 학교를 졸업한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Klimt Ernst, 1864~1892)와 동창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 1861~1942)와 함께 공방을 차려 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구 부르크극장(Burgtheater)을 철거하고 신축하며서 극장의 역사를 담은 벽화를 주문받아 작업(1886~1888)을 완성시켜 일약 유명인사가 되면서 곧이어 일감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고 그 충격으로 공황상태에 빠진다. 1895년 다시 붓을 들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나간다. 특히 아버지의 영향으로 금박을 사용 써서 개성적인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후 그려진 작품들이 그의 불멸의 대표작인 <키스>(1907~1908),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Ⅰ, Ⅱ>(1907), <다나에>(1907~1908), <아담과 이브>(1917~1918) 등이다. 그러다 1918년 초 56세의 나이로 당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뇌출혈로 발전 그해 2월6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잊혀져가다 사후 50년이 지나면서 새롭게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등극했다. 

 법정드라마 같은 형식을 띄지만 영화는 기나긴 8년 동안의 소송과정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치가 점령했던 오스트리아에서 겪어야 했던 마리아네 집안의 처절한 고통의 역사 즉 유대인들이 나치시절 오스트리아에서 당했던 아픈 상처들이 낱낱이 세상에 알려주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이기도하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오스트리아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사람들은 돌변했다. 합스부르크 왕국의 600년 영광이 휘청거리던 시절 황제로 등극한 프란츠 황제의 명령으로 유대교인과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들과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의 시민이 되었다. 황제는 특히 유대인들의 경제력과 결집력을 이용해 오스트리아의 부흥을 기도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특히 비엔나의 경제, 문화, 예술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하면서 유대인들은 악몽의 시대를 맞았다. 이전까지 누리던 시민의 권리를 잃은 것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치 선전의 희생자가 되었고 1차 대전의 패배에 대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히틀러에 의해서 경제 몰락의 원인으로 낙인찍혔다. 생존권마저 위협받던 그들은 급기야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법을 통해 시민권을 빼앗기고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과의 결혼까지도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은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종사할 수도 없도록 했다. 매력적인 비엔나는 유대인들에게는 악몽의 도시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집이나 가게는 ‘유대인’이라는 낙서로 범벅이 되었다. 영화에서 마리아가 함께 탈출할 수 없는 부모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나치의 게슈타포에게 전 재산을 헌납(?)하고서야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세계는 “유대인이 살 수 없는 곳과 들어갈 수 없는 곳”뿐 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한 폴란드 계 유대인들이 다시 폴란드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받아주지 않았고 되돌려 보내기까지 했다. 오직 갈 곳은 나치가 점령하지 못한 섬나라 영국뿐 이었다. 그리하여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 뒤 1939년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 옛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7만여 명이 영국으로 도피했다고 한다. 이 당시 나치는 유대계 독일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재산을 빼앗으며 1945년 1월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하틀러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에게 명령해서 ‘엘른자츠타프’(Elnsatzstab)라는 미술품 약탈을 전담하는 부대를 만들어 점령하는 나라의 명작들을 모았다. 그는 린츠에 총통박물관(Führer museum)을 세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품들로 채울 생각이었다. 그가 약탈한 회화, 조각, 공예 및 수예품, 및 실내 장식품은 무려 500~600만점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약탈한 작품 중 일부는 팔아서 전쟁비용으로 사용했으며 한편으로는 ‘퇴폐미술’(Ausstellung der entarteten Kunst)이라고 낙인을 찍어 소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치에게 약탈당했던 그림들을 돌려주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는 클림트의 그림을 돌려받았으나 원주인이 기증하기 전의 작품이었던 탓에 원소유권이 마리아와 그 상속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재판을 통해 확인함으로서 되찾을 수 있었다. 


퇴폐미술전 관람을 위해 몰려든 인파 1937


 사실 우리나라도 많은 문화재를 전란 중에 약탈당했다. 이는 세계 공통의 현상이기도하다. 따라서 문명사회에서 문화재 반환(cultural property repatriation, art repatriation)은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특히 제 3세계국가들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문화재가 불법적인 과정을 거쳐 다른 나라의 공공기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게 경우 원 소유국에 반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불법적으로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를 환수하기 위해서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유네스코(UNESCO)가 중심이 되어 관련 협약을  제정되어 왔다. 하지만 협약이 강제력이 없는 국제법인 탓에 선언적 의미만 있을 뿐이다. 또 문화재 반환에 가장 많이 원용되는 ‘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Means of Prohibiting and Preventing the Illicit Import, Export and Transfer of Ownership of Cultural Property)은 1970년 이후 거래된 문화재에만 적용되는 한계가 있다. 결국 문화재 반환에 관한 국제적으로 구속력 있는 협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이해당사국 정부 간 협상, 기증, 구입을 통하여 반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문화재 약탈은 로마 시대부터 전리품의 형태로 시작되어 제국주의 시대에는 서구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피 점령국의 문화재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일본은 진주 연지사 동종을 약탈해갔으며 1447년 제작된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이 당시에 약탈된 것으로 추정된다. 1790년대 프랑스는 이탈리아 로마를 점령하고 볼로냐 협약을 체결해 합법적이며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약탈한 문화재들은 파리로 옮겨져 현 루브르 박물관 전신인 프랑스 공화국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으나, 1815년에 빈 협약이 체결되고 이탈리아에 반환했다. 현재 바티칸에 있는 <라오콘 군상>도 이 중하나로 1816년 반환된 작품이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원정해 고대유물과 기념비를 수집해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학사원에 전시를 했다. 그러나 1801년 프랑스군이 항복하면서 영국군이 압류해서 영국으로 옮겨왔다. 현재 영국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로제타석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1860년 아편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의 원명원을 파괴하고 문화재를 약탈했다. 또 1866년 프랑스는 천주교 박해를 이유로 조선에 함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점령하고 외규장각에 있던 1042종 6130책 중 340책의 도서와 지도 2점, 족자 7개, 옥책 3개 등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약탈된 외규장각 도서 298책은 2003년과 2011년에 대여 방식으로 반환되었다.

 또 20세기 초에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유적을 영국, 독일, 일본의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이 약탈을 했다. 영국의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1943)은 둔황 천불동에 보관 중이던 약 7,000점의 불경과 고문서를 영국으로 반출했다. 또 1908년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도 일정금액을 지불하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을 비롯, 독일로 반출된 만큼의 유물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또 일본의 승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도 5,000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반출했고, 미국의 랭던 와너(Langdon Warner , 1881~1955)도 막고굴의 유물을 미국으로 반출했다. 오타니가 일본으로 유출한 돈황유물 중일부는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과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강대국들이 문화재 약탈을 자해했다. 나치의 문화재 약탈 및 파괴 행위는 영화에서 보여 준 것 이상으로 독일은 당시 2만점 이상을 프랑스에서 약탈해갔다. 또 나치의 괴뢰정권인 프랑스의 비시 정권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유대인들로부터 10만여 점의 문화재를 약탈했다. 러시아는 1945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에서 발굴하여 독일이 보관 중이던 프리아모스의 보물 등 약 200만점을 약탈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1943년 발표된 ‘런던 선언문’에 따라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이 벌어져 일부 약탈 문화재가 본국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쟁 중 문화재 약탈은 자행되어 2003년 이라크 전쟁 중에도 이라크의 바빌론, 수메르, 아시리아 문화의 문화재 3,000~7,000점이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전쟁은 인명은 물론 문화재와 미술품의 희생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국가는 물론 개개인의 노력으로 자기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인류의 문화적 자산이자 역사이기도한 문화재나 미술품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정준모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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