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은 더욱 융성해갔고 조카인 마리아도 1937년 오페라가수였던 프레드릭 알트만(Fredrick(Fritz) Altmann, 1908~ 1944)과 결혼해 집안을 이룬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파리로 신혼여행을 다녀 온 다음해인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 유대인들을 잡아 가두면서 남편인 프레드릭과 그의 형제 베른하르트도 다카우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큰 재산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헌납을 하고서야 오스트리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부부는 영국으로 탈출해서 리버풀을 거쳐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 폴리버에 도착했고 이후 LA에 정착해 4명의 자녀를 얻고 캐시미어 스웨터 장사를 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고 1945년 미국시민권을 얻어 미국시민이 되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병합되면서 유대인들의 삶은 무너졌다. 유대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과 약탈이 일어났고 아델레와 블로흐 바우어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는 유대인들을 철저하게 배신했다. 전쟁의 기운이 유럽 대륙을 감싸고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로 진격해오자 비엔나 사람들은 앞 다투어 나치 깃발을 흔들며 환영하고 나섰고, 유대인들은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했다. 페르디난트는 합병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지원하지만 실패하고, 재산을 빼앗으려는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와 그 후손들은 스위스로 망명했고 사업체와 대저택 그리고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을 비롯해서 클림트의 그림과 드로잉 등 16점을 포함한 많은 미술품들을 나치에 빼앗겼다. 이때 유대인 명문가인 로스차일드 가(Rothschild family)와 레더러 가(Lederer family)등이 소장했던 예술품 3만 5000여점도 약탈당했다고 한다. 나치는 약탈한 예술품들은 남부 오스트리아 가밍의 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어서 전쟁의 포화를 피할 수 있었고 이후 나치 패망과 더불어 압수 예술품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정부에 귀속되었다.
미국으로 이주해서 오스트리아에서의 아픈 추억을 모두 잊고 살던 마리아는 어느 날 문득 오스트리아 정부가 나치시절 유대인으로부터 약탈한 예술품을 불법으로 취득해 이익을 취하고 이를 은폐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접한다. 사실 1990년 오스트리아의 녹색당은 나치 시절 약탈당했던 작품들에 대한 처리를 위한 법안을 검토하기 시작해서 1998년 드디어 약탈 작품의 처리과정을 투명하게 밝히고 이를 배상하고 돌려주어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 법이 통과된 후 정상적으로 기증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 등 숙모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국가의 소유가 되어 국립미술관인 벨베데레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스트리아의 탐사전문 기자인 후베르투스 체르닌(Hubertus Czernin, 1956 ~2006)이 보도하면서 알게 되었다.
체르닌은 1998년 아델레 부인의 유언장 등을 추적해 미국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에 탐사 기사를 게재했다. 아델레는 “남편이 사망한 다음 클림트의 작품인 내 초상화 2점과 풍경화 4점을 국립오스트리아미술관에 기증해 달라”고 유언장에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하지만 나치는 1938년 페르디난트가 소장했던 클림트의 작품 5점을 압수해 3점은 빈에 있는 오스트리아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나머지 2점은 매각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기사였다.
사실 나치는 1943년 몰수한 클림트의 그림들을 전시하면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도 전시를 했었다. 하지만 나치는 이 그림이 약탈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세탁하거나, 유태인의 이름을 쓰기 싫었던지 이 그림의 제목을 <디 프라우 인 골드Die Frau in Gold> 즉 영어로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라고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든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이를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서 미술품의 약탈사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 기사는 마리아에게 나치 치하에서의 고통과 함께 1945년 취리히에서 세상을 떠난 작은아버지가 모든 유산을 자신과 자신의 언니에게 상속한 사실을 새삼 상기시켰다. 기사는 적어도 아델레의 남편이 죽은 1945년까지 그 작품들의 소유권은 분명하게 마리아의 작은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작은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그의 동의 없이 작품이 오스트리아 정부에 귀속되었으니 당연히 그의 소유였고 따라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재산을 자신들에게 남겼으니 당연히 약탈당한 작품 또한 자신들에게 상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마리아는 클림트가 그린 숙모의 초상화를 수소문해서 오스트리아 벨베데레미술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그림을 돌려받기 위해 영화에서 라이언 레이놀즈(Ryan Reynolds, 1976~ )가 열연한 초보 변호사 랜돌 쉔베르크(E. Randol Schoenberg, 1966~ )와 함께 길고도 지난한 싸움을 시작한다.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 1907, 캔버스에 유화, 금박, 은박, 138×138cm, Neue Galerie, New York
사실 마리아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풍경화는 자신을 비롯한 상속자들에게 돌려주고 초상화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소유로 하자는 내용의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에 부역하면서 저질렀던 과거를 인정하고 속죄하기보다는 이를 덮으려고 할뿐만 아니라 정당하게 작품을 소장했다고 강변한다. 이에 1999년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려했다. 하지만 소송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법에 의해 5점의 작품가를 1억3천5백만 달러(약 1,516억원)로 추산하여 소송을 위한 인지대로 1,500만 달러(약 168억원)가 필요했다. 물론 오스트리아 정부는 후에 35만 달러(약 4억원)로 낮추어주었지만 마리아에게는 감당 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마리아와 쇤베르크는 2000년 미국법정에 소송을 제기한다. 마리아는 외국의 주권은 자국법정의 관할을 받지 아니한다는 면책특권인 외국주권면책특권법(FISA, 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에 따라 미국 지방 법원인 캘리포니아 중앙 지방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정부와 마리아간의 소송은 미국의 대법원이 오스트리아 법률에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최종판결을 내렸다. 이러한 판결 후 마리와 오스트리아는 3인의 판사로 구성된 중재위는 2006년 1월 6일 오스트리아는 마리아를 비롯한 5인의 상속인에게 작품을 되돌려주라고 결정을 내렸고 이에 양자는 동의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는 그림을 돌려주었다.
우먼인 골드의 실제인물 Maria Altmann, E. Randol Schoenberg
이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는 ‘안녕, 아델레’(Ciao, Adele)라는 현수막이 걸릴 정도로 시민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아무튼 8년의 공방 끝에 마리아의 품으로 돌아오자마자 클림트의 그림들은 그해 6월 30일까지 로스엔젤리스 카운티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LACMA)에서 전시되었다.
그 후 마리아는 “작품은 항상 공공에게 전시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작품을 내놓았고 2006년 5월 1500억 원에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 로더의 소장품이 되어 7월 13일부터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에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때 나머지 4점도 함께 7~8주 정도 전시되었다. 그 후 2006년 11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Ⅱ>도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되어 8천8백만 불(약 990억원)에 개인소장가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14년부터 뉴욕의 모마(Museum of Modern Art, MoMA)에 장기대여 되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4점도 로널드 로더가 총 1억9,270만 달러(약 2,166억원)을 지불하고 노이에갤러리 소장품으로 확보하였다. 작품을 판매한 총금액은총 3억 2700만 달러(3,675억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여기서 변호사 수임료를 제하고 나머지 돈은 5인의 상속자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마리아는 마리아 알트만 가족재단을 만들어 로스엔젤리스의 홀로코스터 박물관과 공익적인 분야와 자선단체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Ⅱ> 1912, 캔버스에 유화, 190x120cm, 개인
무조음악을 창안한 현대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1874~1951)의 손자이기도한 초보 변호사 쇤베르크도 이 소송으로 인해서 약탈 미술품 반환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쇤베르크는 이 사건을 수임할 당시 컨틴전시 베이시스(Contingency basis) 즉 사건이 해결되면 수수료를 받는 방식으로 수임했기 때문에 전체 작품가의 약 40%를 받기로 계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는 약 1억 2000만 달러(약 1350억 원)의 수임료를 받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변호사 랜드 쇤베르크도 로스앤젤레스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부속건물을 건립하는데 기금을 헌납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품 반환을 전문으로 하는 로펌을 설립해 활동 중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