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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한 여자의 사랑 <르누아르(Renoir,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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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준모(문화정책,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처럼 널리 또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화가도 드물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로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와 와토(Jean-Antoine Watteau,1684~1721)를 이은 화가로 칭송받는 그는 동료 화가들이 생활고에 허덕이며 그림을 그릴 때 과감하게 인상파전에서 컬렉터들이 많은 살롱전으로 건너가 자신의 입지를 다지면서 유복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부유한 세계의 ‘행복’을 그리고자 했던 르누아르의 세속적인 성공은 그의 한미한 집안 형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도자기로 유명한 리모주(Limoges)의 가난한 양복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4살 때 부모가 파리로 이사를 온 후 파리의 중심가 아르장퇴유(Argenteuil)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노래에 소질을 보였지만 집안이 어려워 레슨을 포기하고 13살 때부터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야 했다. 물론 이 경험은 그가 후에 화가로서 색채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재능을 알아본 공장주인은 그가 에꼴 드 보자르에 진학하기 위해 레슨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르누아르 또한 공장 일을 하는 중에도 점심시간이면 루브르미술관에 가서 와토나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의 작품을 보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기간도 잠시 당시 거세게 불어 닥쳤던 산업혁명바람은 어린 17살짜리 소년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 그는 생계를 위해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실내장식을 위해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1862년 글레이르(Marc Gabriel Charles Gleyre,1806~1874)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1841~1870) 등을 알게 되었고 또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세잔(Paul Cezanne,1839~1906), 기요맹(Jean Baptiste Guillaumin, 1841~1927)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의 일원이 되어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이미 예고한다.  

 르누아르는 프랑스와 독일이 맞 붙은 프로이센 전쟁(1870~1871)에 군인으로 나아갔고 이 전쟁에서 친구인 29세의 화가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를 잃었다. 전쟁은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지방을 내어주면서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르누아르는 전쟁을 잊기 위해 더욱 그림에 몰두한다. 그는 화가로서 매우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많은 화가들이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그의 그림은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 즉 쁘띠 브루주아 계급의 취미와 기호에 맞는 아름답고 편안하고 온유한 그림으로 인기를 독차지 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 영향이 프랑스에도 미쳐 가내수공업에서 공장제 수공업으로 전환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중상공인들은 다비드나 앵그르 풍의 고전주의나 아카데미즘보다는 보기 좋고 편한 그림을 선호한 때문이다. 특히 이런 중산층의 기호를 간파했던 천재적인 화상 뒤랑 뤼엘(Paul Durand-Ruel, 1831~ 1922)을 만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다. 

 전쟁에 나갔다 돌아온 그의 작품은 점차 밝아지기 시작해 1874년 제1회 인상파전람회에 참여했고 2회, 3회 전시에도 참여하면서 더욱 더 맑고 빛나는 색채를 구사한다. 그 후 1879년 르누아르는 드디어 살롱에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1878)을 출품하면서 인기와 성공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리고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 1520)나 폼페이 벽화를 보고나서 그의 화풍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색은 담백해졌고 선으로 형태를 명확하게 표현했으며 화면구성에 중점을 두는 고전적인 경향의 그림으로 선회하여 점차 인상파를 극복하고 독자적으로 색채가 풍부하고 인체도 풍성한 원색이 강하게 대비되는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한다.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1878)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꽃과 어린이, 누드를 주제로 빨강이나 주황색, 황색을 주조로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이를 뒷받침하는 부드럽고 미묘한 뉘앙스가 관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즐겁고 행복한 그림의 전형적인 르누아르를 완성하여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하지만 1892년경부터 르누아르(미쉘 부케분, Michel Bouquet, 1925~ )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얻게 되고 이로 인해 화가로서 위기를 느낀 그는 1907년, 겨울에도 따뜻한 지중해의 바람이 관절염에 회복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며 니스근처 칸 수메르(Cagnes-sur-Mer)에 ‘르 꼴레트’(Les Collettes)라는 집을 지어 이사를 한다. 그는 죽을 때 까지 이곳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고 최후 10여 년 동안은 조수를 써서 조각 작품도 제작했다.
 
 영화는 르누아르의 말년인 1915년경 르 꼴레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첫 번째 아들은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피에르(Pierre Renoir, 1885~1952)이고 둘째는 영화감독으로 아버지의 조형감각을 물려받아 감각적이면서도 휴머니즘이 넘치는 명작을 남긴 쟝(Jean Renoir, 1894~1979) 그리고 도예작가로 성장한 클라우드(Claude Renoir, 1901~69)이다. 


영화감독인 아들 장 르누아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군에 나갔던 장(뱅상 로티에르분, Vincent Rottiers, 1986~ )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르 꼴레르로 돌아온다. 영화가 시작되고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가 연결되어있는 듯 아름다운 화면의 연속이다. 물론 이후에도 영화는 각각의 그림이 한 컷 한 컷 모여 영화가 된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진다. 영화는 질 부르도스(Gilles Bourdos, 1963~ )가 감독을 맡았는데 사실 영화 속 풍광은 영화 <화양연화>(2000)와 <카페 뤼미에르>(2003)의 촬영감독인 대만출신 리판빙(李屏賓, Mark Lee Ping-bing, 1954~ )의 공이 크다. 그는 르누아르 그림을 다시 그리듯 찬란한 빛과 유려한 색채를 포착해냈다. 또 의상에 영화 <8명의 여인들>의 디자이너인 파스칼린 샤반네(Pascaline Chavannes)와 영화 <킹스 스피치> 음악을 담당했던 알렉상드르 데스플라(Alexandre  Desplat, 1961~ )가 함께해 영화의 밀도를 높였다. 


 사실 르누아르로 대변되는 회화의 시대는 인상파를 끝으로 절대적인 ‘사진, 영화의 시대’로 전환된다. 풍경이나 이미지를 재현하는 눈속임회화는 이제 그 의미를 다하고 사진이나 영화에 자리를 내 주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후 등장하는 표현주의나 상징주의 그리고 후기인상주의나 야수파 등이 그것이다. 르누아르도 사진기처럼 빛을 포착하여 순간순간 변화하는 모습을 화폭에 재빠르게 담아내면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나갔다. 아니 변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니스인근의 프렌치 리베리아 지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주는 모델 데데(크리스타 테렛분, Christa Theret, 1991~ )를 만난다. 그가 처음 르누아르의 집 르 꼴레트를 찾는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이기도 한데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싱그럽고 아름답다.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시각으로 르누아르의 정원을 가로지르는 장면에서 영화의 주인공은 르누아르나 르누아르의 아들인 장이라기보다는 데데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데데가 르누아르의 집을 찾아가면서 만나는 현실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건조하고 무표정한 모습과 나무에 매달린 인형은 암울한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데데의 처지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곧 알게 해 준다. 여기에 데데를 안내하는 르누아르의 셋째아들 클라우드(토마스 도렛분, Thomas Doret, 1996~ )의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모습은 마치 야생의 자연에 놓인 위험과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현실을 시사한다. 이런 현실은 데데나 클라우드는 물론 전쟁에 나가 부상을 당해 집에 휴가차 와있는 장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참혹한 현실은 젊음을 한 없이 쪼그라들게 만든다.(계속)

정준모 관리자
업데이트 2024.12.0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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