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그는 수많은 곳을 직접 여행하면서 스케치를 하면서, 육십년 이상 쉬지 않고 노예처럼 그림만 그렸다. 그는 항상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혼자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작업했다. 작품도 잘 팔지 않았다. 사생활도 잘 알려지지 않아 죽은 후에야 그에게 숨겨놓은 여자와 딸 둘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자신의 작업에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스케치 1만9천 점과 스케치북 200여권을 기증해 현재 테이트 브리튼에 11개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 가히 영국미술사의 대표작가로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서도 소개되었듯이 당시 펜촉을 만들어 팔던 조셉 질로트(Joseph Gillott, 1799~1872)가 그의 모든 드로잉과 그림을 돈 10만 파운드에 팔라는 제안을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한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때로는 터너의 관점이나 미학보다는 데카당한 낭만파적 기질이 농후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는데다 그의 자연에 대한 탐구의 태도를 네덜란드에서 돌아오는 돛대에 스스로 묶이는 모습으로 연출한 것은 객기와 허세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 속 터너는 괴짜에 독선적이며 괴팍하고 산만한 사람으로 그려져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리기도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이런 영화적 과장에도 불구하고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 있는 감독 마이크 리가 영국 리얼리즘을 지칭하는 ‘키친 싱크 리얼리즘’(Kitchen sink realism)의 대가라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교하게 재현된 터너와 그 주변사람들 그리고 집안의 가구와 의상 등은 당시 영국 런던의 하층민들의 삶을 그대로 전해준다. 여기에 하녀 한나의 원망과 시기 그리고 존경이 담긴 신이라던가 터너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 등 인간적인 면모를 살린 소소한 장면들은 역시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여기에 미술학교 출신답게 아주 섬세하게 키 작은 풀꽃들이 다투어 핀 해안절벽이나 파란색과 보라색이 절묘하게 층을 이루는 석양, 육지의 바다를 향해 달려드는 파도 등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정교한 풍경들을 화면 중간 중간에 넣고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터너에게 돌려 이 풍경을 스케치하는 터너를 잡아낸다. 이리하여 터너의 회화가 자연주의를 넘어 낭만을 넘어 ‘순간’에 주목해서 그 ‘상황’을 ‘전달’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대개의 전기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인생의 굴곡을 통해 주인공을 부각시키려 하지만 감독은 담담하게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이야기를 쌓아간다. 특히 그는 터너가 화가라는 점에 방점을 두어 음악사용을 절제하는 대신 시각적인 면을 강조했다. 예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북유럽풍의 풍경화 같은 자연풍경이 그것이다. 여기에 전체적인 화면의 분위기는 당시의 의상이나 가구들을 매우 정교하게 재현하고 있어 시대 속에 화가로서 생활인으로서의 터너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 게다가 터너의 천재성보다는 일상의 생활인으로, 도시의 하층민으로 태어난 출신성분, 예술가로서의 치기와 객기 등의 인간적인 면모 즉 터너의 삶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영화의 흐름 중간 중간에 삽입시켜 사뭇 무거울 수 있는 전기 영화의 틀을 벗어나면서 영화적 리얼리즘의 틀이라는 자신의 프레임을 고수한다.
터너에게는 두 딸을 둔 아내 사라가 있었다. 그는 일정한 생활비를 아내에게 보내주었지만 아내와 그 두 딸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라는 간혹 터너를 찾아와 양육비와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하지만 그는 결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냉혈한으로 그려진다. 또 그의 하녀이자 조수인 동시에 성적 해소상대인 한나를 대하는 모습에서도 그는 인간적이기보다는 자신의 그림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한나는 그런 터너를 사랑해서 불행하다. 비록 한나는 하녀지만 젠체하면서 그림을 보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귀족들을 가끔 혼내주고 비웃을 줄도 아는 이였다. 또 때로는 그들의 허세를 무관심하게 바라보거나 심드렁하게 대함으로서 당시 귀족들의 허영을 꼬집는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이렇게 무심한 듯 한 터너에게도 순정은 있었다. 그가 바다를 관찰하고 바다풍경을 그리기 위해 마게이트(Margate)를 자주 찾았던 그는 숙소의 여주인인 소피아 부스를 만난다. 노예선의 선원이었던 그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진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닮았다는 고백과 함께. 그리고 그는 돛대에 몸을 묶고 바다로 나가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을 한다. 하지만 터너가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전장을 누비던 테메레르호가 해체되기 위해 끌려가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터너도 생의 종말을 행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러스킨과 클랭 그리고 터너 등등의 자연의 묘사에 대한 토론의 깊이가 깊어가고 런던에서 증기선을 타고 다니던 마게이트에 철로가 생긴다. 터너는 증기를 내뿜으면서 내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보며 시대의 변화를 예감하고, 앞으로의 시대는 연기와 철과 증기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과부가 된 부스가 만난 새로운 반려 터너도 나이를 먹어 쇠잔해지면서 그녀는 런던의 템즈 강변 첼시 지역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터너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터너의 새로운 그림을 향한 비난은 그를 더욱 더 숭고함이라는 미적가치에 회의를 갖도록 했고 고독함과 외로움으로 남았다.
터너 <비, 증기,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Rain, Steam, and Speed-The Great Western Railway> 1844
과부가 된 부스가 만난 새로운 반려 터너도 나이를 먹어 쇠잔해지면서 그녀는 런던의 템즈 강변 첼시 지역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터너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터너의 새로운 그림을 향한 비난은 그를 더욱 더 숭고함이라는 미적가치에 회의를 갖도록 했고 고독함과 외로움으로 남았다.
사실적이며 묘사적인 그림에 대한 회의가 커져 갈 즈음 그는 동네 사진관을 찾는다. 당시 미국에서 들여 온 카메라 옵스큐라는 비록 흑백으로 표현되는 것이었지만 화가들에게는 무서운 적이었다. 이제 화가의 역할을 카메라가 대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마 터너도 이런 카메라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사진관을 찾았을 것이다. 그가 목 받침대에 의지해서 10초 동안 사진을 찍고 나서 사진사의 끝났다는 말에 “나까지도 끝난 느낌이네.”라고 말하는 장면은 사실적인 회화의 종말이 왔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알리고자 하는 듯하다. 그리곤 이내 부스와 두 사람이 영원히 같이 있기 위해 사진관을 다시 찾는다.
이렇게 터너가 낭만주의를 넘어 추상으로 항해를 해 갈 때 세상은 거꾸로 흘러간다. 라파엘 전파(Pre- Raphaelite Brotherhood)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당시 아카데믹한 그림에 반기를 들어 혁신을 꾀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라파엘로(Raffaello, 1483~ 1520) 이전의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에 가치를 두고 그곳에서 영감을 얻어 세밀하고 사실적인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또 진실과 자연의 영감과 도덕적, 문학적 중요성 그리고 인위적인 시적 상징주의를 중히 여겼다. 젊은이들의 새로운 시도가 되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셈이다. 터너는 왕립미술원 전시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나무꾼의 딸>이라는 작품과 같은 복고풍으로 회귀하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의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미학이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낙담한다.
밀레이 <나무꾼의 딸The Woodsman's Daughter> 1851, 유화, 89 x63.8cm, 길드홀 아트갤러리
빠른 속도로 과학과 산업의 발달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첼시에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 부스의 집으로 향하고, 그의 주머니에서 새로운 주소를 발견한 한나도 그 주소를 들고 부스의 집으로 향하지만 이미 터너는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나는 집 앞에 이르지만 끝내 들어가지 않고 발길을 돌리고 만다. 그리고 터너는 마침내 숨을 거둔다. “태양은 신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모네 <해돋이 인상> 1872, 48×63cm, 캔버스에 유채, 마르모탕 미술관
이렇게 터너는 곧 등장할 인상파들을 위해 험로를 개척했지만 세상은 그를 외면하고 시계를 되돌려놓았다. 그리고 영국의 회화도 쇠퇴하면서 결국 보불전쟁 중에 영국에 건너왔던 프랑스화가들에 의해 인상파라는 이름으로 그 맥이 이어지면서 터너는 부활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