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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그전에 그가 있었다

글/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우리가 ‘문화융성’을 기치로 문화복지와 창조적 산업으로서의 문화에 집중하는 것처럼 영국은 이미 1997년 영국은 음악 미술 패션 등 예술 분야를 선도하는 분야를 창조산업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를 적극 지원하여 영국의 이미지로 사용하고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 사업을 전개했다. 그들은 단순히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 산업의 비즈니스 효율성을 높이는 핵심 산업으로 위상을 높여 명실공히 문화콘텐츠 강국으로 자리잡았다. 

 오늘날의 성공적으로 조성된 영국의 문화적 자산과 이미지는 정책과 문화전략이 결합하여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영국의 문화적 이미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영국은 보수의 상징이었다. 이런 보수적인 이미지의 영국이 어떻게 일탈과 도발을 일삼는 뮤지컬과 영화 소설 그리고 현대미술의 강국으로 부상했을까. 그들은 196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비틀즈 이후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문화, 소비되는 문화를 창조했다. 사실 문학사나 미술사를 살펴보면 영국의 역사와 세계사적 지위에 비해 유명한 예술가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미술계에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일군의 젊은 작가들을 등장시킨 이래 영국의 현대미술이 세계의 미술을 선도하고 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국가와 민간 그리고 공공기관과 미술관, 문화외교와 미술시장들이 아주 정교하게 시계처럼 맞물려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던 일반국민들까지도 현대미술에 열광하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터너상(Turner Prize)이라는 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 제정된 이 상은 매해 12월 그 한 해 동안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나 프로젝트를 보여준 50세 미만의 영국 미술가를 수상자로 선정한다. 그런데 이 상의 명칭을 터너상이라고 한 것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가 영국의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인 때문이다. 사실 터너는 인상파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빛을 그리고자 했던 인상파화가들에게 슬쩍 답안지를 보여준 사람으로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인상파의 인기가 더해질수록 그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이발사로 일하던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에 누이를 잃고 이에 상심한 어머니마저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터너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는 터너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차 아들이 화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터너는 삼촌이 사는 시외에 머물며 목가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많은 스케치를 했는데 이때의 스케치 습관이 그가 평생토록 즐겨했던 드로잉 습관으로 굳어졌다. 아버지는 터너가 11~12세 때 그린 드로잉을 가발가게에 걸어놓고 팔기도 하였다. 미 무렵 터너는 건축 제도사였던 토마스 말턴과 토마스 하드워크의 조수로 들어가 그림을 그렸으며 이때 정확한 원근법 묘사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말년에 이발사를 그만두고 독신인 아들을 위해 집사처럼 집안을 돌보았고 물감을 준비하거나 캔버스 밑칠을 하는 조수가 되기도 했다. 1789년 14세에 왕립미술원(Royal Academy)에 입학하여 수채화를 배우기시작한 터너는 주로 수채화와 판화에 집중했는데, 20세 경부터 유화를 시작해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웨일스의 풍경화가 리처드 윌슨(Richard Wilson, 1714~82)과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영국 국내 여행을 통해 본 풍경을 소재로 삼았다. 24세 때에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3년 후에 로열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이무렵 터너는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82)의 <시바여왕의 승선>의 빛이 생동감있게 표현된 장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클로드 로랭 <시바여왕의 승선> 1648, 유화, 149.1×196.7cm, 영국국립미술관, 런던


 1802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프랑스혁명전쟁은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이 체결되면서 끝나게 되고, 이때 터너는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과 다른 문화와 자연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특히 루브르를 방문해 다양한 프랑스 미술작품들을 접했다. 이때 터너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풍경화 소재를 모아 500점이나 되는 스케치를 남겼다. 이 무렵부터 N.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이나 C.롤랭의 고전주의 풍의 풍경화에 이끌려, 특히 구도에서 크게 영향을 받으며 고전적인 풍경화가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터너는 곧 로랭의 정적인 세계에서 동적이며 현란한 색채를 지닌 화풍으로 옮겨갔다. 


푸생 <피라무스와 티스베가 있는 폭풍우치는 풍경Stormy Landscape With Pyramus And Thisbe> 1651, 캔버스에 유화, 273x192cm, 쿤스트인스티튜트, 프랑크푸르트


 화가로서 유명세를 얻자 1804년에는 자신의 화랑을 열어 직접 자신의 그림을 주문받아 팔기시작했다. 1812년에는 터너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눈폭풍,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Snow Storm, Hannibal and his Army Crossing the Alps, 유화 146X237.5cm 테이트 브리튼소장)를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 터너는 새로운 화풍의 시도해 완성하였다. 1819년에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그림의 색채에 밝기와 빛을 더했고, 로마에 체류하면서 많은 드로잉 작품을 제작했다. 이후에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풍경화를 제작하는데 점차 구도가 단순해지고 빛에 의한 섬세한 색채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리고 1820년 전후부터 그의 그림은 급격한 양식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자연주의적인 그림에서 낭만적 경향으로 변모한다.  


터너 <눈폭풍,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Snow Storm, Hannibal and his Army Crossing the Alps> 1812, 유화, 146 × 237.5cm, 테이트 브리튼



영화 <미스터 터너> 포스터


 영화 <미스터 터너>(Mr. Turner, 2014)의 감독 마이크 리(Mike Leigh, 1943~ )는 터너의 일생을 다루기보다는 그가 어느 정도 화가로서 입지를 다졌던 1820년 경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인생 후반부를 다루었다. 고집스럽게 본능적으로 자신의 회화를 고집했던 터너 역은 티모시 스폴(Timothy Spall, 1957~ )이 맡아 2014년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터너의 아버지는 폴 제슨(Paul Jesson, 1946~ )이, 또 터너의 추종자인 하녀 한나는 도로시 앳킨슨(Dorothy Atkinson, 1966~ )이 맡아 묘한 백치미와 섬뜩한 표정연기로 영화의 긴장감을 더하기도하고 때로는 실소를 낳게 하는 폭 넓은 연기를 펼친다. 실제로 그는 터너가 죽은 후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또 터너의 연인이었던 과부 소피아 부스 역은 마리온 베일리(Marion Bailey, 1959~ )가 맡아 터너의 화가로서의 삶을 내조한다. 


그리고 터너의 화풍이 낭만적으로 바뀌면서 그에게 쏟아지는 ‘환상’, ‘신비’, ‘수수께끼’ 등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을 때, 작가의 주요 역할은 “자연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궁지에 몰린 터너를 옹호해준 미술 평론가이자 패트런이며, 수채화가인 동시에 저명한 사회 사상가, 자선사업가인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역은 조슈아 맥과이어(Joshua McGuire, 1989~ )가 맡아 열연했다. 


터너 <해체를 위해 마지막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émé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1939, 유화, 91x122cm, 영국국립미술관


터너 <창백한 말 위의 죽음Death on a Pale Horse> c.1825~30, 유화, 59.7x75.6cm, 테이트 모던


 1829년 터너는 그의 가장 믿음직한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지내다 <창백한 말 위의 죽음>을 제작하고 1834년 런던의 국회의사당이 화재로 소실되는 사건을 주제로 연작을 제작했는데 이즈음부터 터너의 독창적인 구도와 원근법 등 기존의 화풍과는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1839년 트라팔가르해전에서 용맹을 떨쳤던 전함을 그린 <해체를 위해 마지막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를 제작, 터너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터너 자신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하였는데, 노란색과 파란색의 대비, 그리고 붉은색이 조화롭게 묘사된 수작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이런 변화와 새로운 시도는 그의 명성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경멸과 비난의 빌미가 되었다. 그래서 시력이 나빠졌다, 정신이 이상해졌다 같은 말이 들리는가 싶더니, 왕립미술원을 찾은 여왕이 그의 <바다괴물이 있는 일출>을 보고 너저분한 노란색으로 범벅이 된 화면이라고 혹평을 하기에 이르렀다.  


터너 <바다괴물이 있는 일출> 1845년경, 유화, 91.4x122㎝, 테이트 브리튼


  사람들에게는 다소 추상적으로 보이고 무엇을 그렸는지 모를 그림이었지만 터너는 그림을 위해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보수적인 아카데미즘으로부터 변화를 시도했다. 변화의 동력은 단순히 그의 상상력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충실한 관찰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는 특히 여행을 통해 직접 몸으로 겪은 자연, 즉 ‘장소의 특수성’을 중시했다. 그는 자연의 위대한 힘과 특질에 몰두하면서 이탈리아, 프랑스, 스코틀랜드는 물론 플랑드르 지방까지 두루 여행하며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느끼게 된 자연을 빛과 색을 통해 본대로, 보이는 대로 그리는 새로운 사실주의를 실천한다. 그는 인위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보다 화면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어떤 역동적인 힘 또는 세력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긴장된 ‘순간’을 주목한다. 그는 더 이상 서사적인 ‘서술’에 매달리기보다는 ‘상황’ 그 자체와 자연 현상의 ‘전달’에 집중한다.  

  “내가 눈보라를 그린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장면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라는 그의 말에서 그는 보이는 자연이 아니라 느끼는 자연을 그리고자 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후대의 미술학도들에게 남긴 그의 조언은 그의 회화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어주고 있다. 그의 화면에는 전개된 빛과 색채의 운동과 그리고 거기에서 발산되는 강한 에너지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역동적이며 유기적이다. 그래서 강한 빛 아래서는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억이나 지식을 통해 그리기는 보다는 사실주의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대로를 그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때로 그의 그림은 작열하는 햇빛으로 인해 너무 밝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으로 가득 찬 흰색의 캔버스가 되기도 했다. 


터너 <풍경> 1840-1850년경, 캔버스에 유화, 92x122.5cm, 워커아트갤러리


 터너는 자연을 보이는 현상으로 보기보다는 스스로가 느끼는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성질에 집중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의 관찰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우주적 질서를 작가의 마음에 형성된 표현 욕구와 화면에서 조형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자연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이런 정서는 그의 미완성 시집 ‘덧없는 희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아는 것, 본 것, 인위적인 것보다는 그가 스스로 체득한 자연을 묵묵히 표현하고, 자신의 질서를 통해 대자연의 숭고함과 자연에서 드러나는 힘의 조화들로 화면을 채워나갔다.   

 이런 그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고전주의와 자연주의, 낭만주의를 넘어 1870년 보불전쟁으로 영국으로 몸을 피했던 모네와 피사로 등 프랑스 인상파 좌장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도달한 숭고미를 넘어 새로운 양식을 통해 아름다움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자했다. 그리고 대가의 경지에 이르러 새로운 형식의 그림을 추구하면서 세상과 맞닥뜨리면서 겪는 좌절과 냉소를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갔다. 그는 더 이상 롤랭의 “정교한 붓놀림의 집합”에 연연하지 않는다.(계속)   


정준모 관리자
업데이트 2024.12.0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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