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미술비평)
처음 영화에 눈길이 간 것은 동화와 현실을 교묘하게 자신의 기괴한 상상력으로 비틀어 그 경계에 관객을 세워두는 악동 팀 버튼(Tim Burton, 1958~ )이 만든 '화가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점도 관심이 갔다. 하지만 새삼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조영남의 대작(大作)이 아닌 대작(代作)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면서였다.
이 영화는 자기 부인의 그림을 마치 자기 그림처럼 팔다가 남편의 과욕으로 부인인 작가의 양심을 자극해서 자신의 그림임을 선언하고 이를 증명하기위해 법정 다툼을 벌이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마가렛 킨(Margaret D. H. Keane, 원명 Peggy Doris Hawkins, 1927~ )은 그의 이름보다 그가 그린 작품의 캐릭터,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실조에 걸린 듯 비쩍 말라 눈만 둥그렇게 큰 빅 아이즈(big eyed waifs)로 더 유명한 화가이다. 1950년대 후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이어 팝아트가 등장할 즈음 즉 미국사회가 전후 가난으로부터 조금씩 회복되어가면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던 산업동력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대량생산과 이를 소비할 대중소비의 시대로 전환되던 시기 그리고 매체의 발달로 광고가 대중화되면서 대중문화가 이전의 고급문화를 대체하는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미학과 작품성은 주류미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90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주류미술로 편입되기보다는 대중의 기호와 취미에 봉사하는 장식용 회화의 범주에 드는 화가이다. 물론 그의 그림이 대중매체와 광고 등 대중 친화적 시각이미지를 미술의 영역에 들여오는 등 일러스트 풍의 팝아트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는 페인팅 즉 회화의 범주로 분류된다. 그 이유는 팝아트가 반反예술적이며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또 미술품의 원작과 원작자의 개념과 미술의 아우라를 부정하는 등의 순수고급예술의 엘리티시즘을 공격하고 예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팝아트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기에 빅 아이즈는 훌륭한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앤디 워홀의 빅 아이즈에 대해 비평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작품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팝아트와 시작을 같이해서 엄청나게 유명해졌으나 허무하게 잊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여전히 유명하다. 그 원작자를 규명하는 재판 즉 법정공방이 흥미진진한 한편의 드라마인 때문이다. 물론 이런 드라마적인 요소보다는 빅 아이즈가 영화화되는 데는 그림의 멜랑콜리한 면이 팀 버튼을 이끈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흥미진진한 법정공방의 이면이자 영화의 줄거리를 들여다보자.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태어난 마가렛 킨(에이미 아담스, Amy Adams분, 1974~ )은 10살 때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하여 내쉬빌의 왓킨스미술학교를 나와 뉴욕의 트라파겐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그는 프랭크 리차드 울브리히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지만 그와 이혼하고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다.
영화 <빅 아이즈>의 한 장면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매우 보수적인 도시였다. 여성의 활동이 지금처럼 자유스럽지 못했다. 화가로서 싱글 맘인 그가 딸을 부양하며 생활하기에는 너무 궁핍했고 어려웠다. 그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공원에 나가 그림을 그려 팔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했다. 그림 한 장에 1달러를 받으며 수줍게 눈이 큰 사람들,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던 그는 어느 날 같은 공원에서 풍경화를 팔던 월터 킨(Walter Keane, 1915~2000)을 만난다. 붙임성이 있고 언변이 좋은 월터 킨(크리스토프 발츠, Christoph Waltz분, 1956~ )은 거의 유일하게 눈이 큰 우울한 아이를 그린 그의 그림을 이해해 주는 이였다. 그래서 외로웠던 마가렛은 마음을 열어 월터를 받아들여 1955년 결혼한다. 월터는 마가렛에게 작업실을 마련해주고 함께 그림을 그리지만 화가로서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작업실에서의 월터와 마가렛
수완이 좋았던 월터는 샌프란시스코 노스비치의 엔리코 반두치(Enrico Banducci, 1922~2007, 존 폴리토, Jon Polito분, 1950~)가 경영하는 클럽 헝그리 Ⅰ(Hungry I)에서 우연하게 마가렛의 작품을 팔게 되고 이를 계기로 화장실 복도의 벽면을 빌어 그림을 걸어놓고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한다. 하지만 바 주인 반두치의 빈정거림에 화가 난 월터가 빅 아이즈가 그려진 그림으로 그를 내리치고 이 일이 신문 1면에 보도되면서 그의 작품이 유명세를 타고 갑자기 완판이 된다.
이렇게 갑작스레 인기작가가 된 나머지 한 평론가와 월터는 마치 자신의 그림인 것처럼 인터뷰를 하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월터가 나서려던 것은 아니었다. 마가렛이 월터 ‘킨’과 결혼하고 그림에 사인을 ‘KEANE’ 이라고 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가끔 작품을 설명해야할 때는 월터도 마가렛도 좀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냥 우선 편한대로 그렇게 하다가 점점 일이 커지고 만 것이다.
인기작가에 유명작가가 되면서 그녀는 자신을 숨긴 채 그림을 그려야 했고 어떤 경우에는 하루에 16시간이상 매달려야 할 정도였다. 이제 자신의 그림이라고 번복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진 나머지 마가렛은 딸 제인에게 마저 빅 아이즈는 월터의 그림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이면에는 여성작가로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환경과 한편으로는 월터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그림을 팔아 얻게 되는 소득으로 편안하고 여유있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밝히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래서 마가렛은 소극적 동조자로서 월터의 공범이 되어간다.
영화 <빅 아이즈>의 한 장면
그는 월터의 고스트 작가가 되어 집에 숨어서 기계처럼 그림을 그리는 삶을 살아나간다. 그 사이 월터의 거짓말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각종 유명인사와 친분을 맺고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특히 마가렛이 영락없는 화가였다면 월터는 뛰어난 화상,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대중화되어가는 미술시장의 흐름을 일찍이 간파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미술품 시장을 공략하기위해 1959년 샌프란시스코에 킨 아트 갤러리를 열었다. 여기서 월터는 ‘빅 아이즈’의 복제본과 포스터, 엽서, 냉장고자석 등등의 캐릭터를 판매하는 사업을 벌여 연간 백만 불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성공한다. 또 나탈리 우드, 딘 마틴, 킴노박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작품을 구매하고 초상화를 주문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당시 뉴욕타임즈 등 전통적인 매체는 이런 싸구려 행위는 예술이 아니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평론가는 빅 아이즈를 “취향 없는 난도질”이라 평했다.
새드 아이즈 인형
아무튼 키치의 시조인 빅 아이즈는 1960년대 초반 서구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린 예술 작품이자 미국 팝아트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남았다. 그림이 곧 돈이 되자 월터는 마가렛에게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라고 압박을 가했고 마가렛은 점점 이런 현실에 대해 좌절한다. 본인 스스로 사실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남을 속이는 데 동조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를 차용해서 스타일리쉬 한 젊은 여성들을 그려보지만 인기를 얻지는 못한다.
사실 월터는 자신이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한 화가라고 칭했지만 누구도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마가렛은 계속해서 감금당하다시피 한 채 그림을 그리고 또 거짓말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월터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월터는 이미 빅 아이즈를 자신의 소유로 저작권 등록을 해 놓은 상태. 이제 진실을 말하겠다고 하는 마가렛에게 월터는 이제 이것이 세상에 밝혀지다면 당신은 파멸이라고 협박을 하거나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또 이혼을 요구하는 마가렛에게 빅 아이즈를 100점 이상 그려주면 이혼에 응하겠노라고 되려 큰 소리를 친다. 이 당시를 월터는 “모두가 모든 것을 속이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이런 와중에도 월터는 더 큰 야망을 드러낸다. 1964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교육관에 걸 대작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완을 발휘해서 빅 아이즈를 한 아이들 100여명이 등장하는 “영원한 내일(Tomorrow Forever)”을 수주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완성되어 걸리고 나서 그림의 진정성과 작품이 선정되는 절차를 문제 삼는 평론이 뉴욕타임즈의 미술평론가로 비평가의 존재론적 윤리문제를 제기해서 유명한 존 캐너데이(John Canaday,1893~1967)에 의해 제기된다. 이 작품은 100명의 어린이들이 존재함으로서 보통의 킨의 작품보다 100배 더 나쁘다며 대중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선정하려면 풍선껌을 선택해 거는 것이 대중들이 더 좋아할 것이라 혹평한다. 소위 주류예술이 아닌 대중예술이 도를 넘어 주요한 현대미술들을 제치고 이런 중요한 행사와 장소에 작품 이 걸린 데 대한 전문가의 지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인기는 여전했다. 월터는 이제 빅 아이즈를 두고 계속 거짓말을 이어가는데 그는 자신이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에서 전쟁으로 인해 춥고 배고픈 아이들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방송에 나가 이야기를 할 정도로 이제 스스로를 속이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아이들의 눈에서 인류의 질문과 답이 담겨있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의 눈에 담긴 순수한 영혼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그림을 그린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 인터뷰는 1965년 라이프지에 실린 내용이다. 여기에 그는 덧붙여 “아무도 엘 그레코처럼 눈을 그릴 수는 없다. 이처럼 아무도 월터 킨처럼 눈을 그릴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때 라이프지는 회화란 “이제 자유세계에서 생산되는 가장 인기있는 예술”이 되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서 더더욱 월터의 욕심에 환멸을 느낀 마가렛은 몹시 화가 나 결별의 결시을 굳혀간다. 그러다 집안에서 월터의 풍경화를 찾아낸다. 그의 그림에서 이상한 예감이 든 그가 월터의 그림에서 사인부분을 긁어내자 KEANE이라는 사인아래 S. CENIC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파리 풍의 풍경화를 자신의 그림이라고 했던 것도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사인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알고 망연자실한 마가렛이 헤어지자고하자 월터는 영화에서는 집에 불을 지르며 협박하는데, 실제로도 “그가 월터를 떠나려고 하면 집을 태워 마가렛을 죽이겠다.”고 했다고 한다. 1964년 이런 그를 뒤로하면서 마가렛은 딸 제인을 데리고 탈출한다. 마치 뉴욕을 떠나올 때처럼 그는 딸의 손을 잡은 채 샌프란시스코를 뒤로 하고 하와이로 향하고 1965년 이혼에 이른다. 마가렛은 근 10년 동안을 월터의 거짓말에 갇혀 산 셈이다. 그리고 월터는 마가렛과 이혼 후, 65년 말 세 번째 재혼을 한다.
1965, 66, 70년 당시의 신문 스크랩
하와이에 정착해서도 마가렛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대가로 약 5년간 월터를 위해 계속해서 2~30여점의 빅 아이즈를 그려 보내주어야 했다. 하와이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귀의한 그는 49세나 연상인 호놀룰루 스포츠 기자 댄 맥과이어(Dan McGuire,1878~1983)와 1970년 재혼한다.
그는 재혼과 종교 덕에 용기를 얻어 그림도 한층 밝아지고 즐거워진다. 이때부터 그는 언젠가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1970년 10월 샌프란시스코 라디오 토크 쇼에 출연해서 빅 아이즈는 자신의 작품이라며 진실을 밝혔다. 월터와 헤어진 5년 뒤의 일로 이즈음 미국에서도 여권에 대한 관심 그리고 페미니즘이 성하기 시작하던 때와 오버 랩 된다. 하지만 월터는 이런 그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마가렛에게 술과 섹스에 굶주린 정신병자라고 비난했다. 여기에 마가렛은 샌프란시스코 광장에서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빅 아이즈를 서로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월터는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가족을 지키고자 월터와 원만하게 관계를 청산하고자 바로 법에 호소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1986년 고소로 이어지기 전까지 ‘빅 아이즈는 도대체 누구의 그림인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1984년 마가렛의 나이가 56세, 월터가 68세이던 당시 월터는 적반하장 격으로 USA투데이에 “마가렛이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작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했고 이에 마가렛은 월터와 USA투데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원작자를 두고 지리 한 공방이 거듭되던 중 1986년 호놀룰루 연방 법원 판사는 진실을 가리기 위해 아주 극적인 제안을 한다. 즉 두 사람에게 동시에 법정에서 주어진 시간 내에 빅 아이즈를 그려보라고 명령한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마가렛은 53분 만에 특유의 작은 소년을 그려 제목을 라 붙인다. 224는 이 사건의 번호였다. 이에 반해 월터는 어깨 통증 등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이에 배심원단은 마가렛의 손을 들어주며 월터에게 40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한다.
이 재판으로 마가렛은 월터가 파산하는 바람에 돈은 못 받았지만 그제야 세상이 인정하는 빅 아이즈의 진정한 작가가 되었고 자신의 빅 아이즈에 당당하게 “MDH KEANE”라는 사인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월터는 재판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항소를 거듭하며 죽기 전까지 자신의 그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2000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 법원은 마가렛의 USA투데이에 대한 소송을 기각했다. 이후 그는 호놀룰루에서 나와 지금도 캘리포니아 나파에서 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는 마가렛 킨
사실 예술적인 가치보다는 대중들과 편하게 호흡했던 캐릭터, 보기 좋고 예쁜 그러면서도 약간은 멜랑콜리 한 이미지로 인해 예술적이라기보다는 상업적으로 더 성공했던 빅 아이즈는 아무튼 1960년대 미국 사회와 여권신장 그리고 대중적인 키치문화의 확산 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이런 캐릭터 또는 시대적 아이콘으로서의 빅 아이즈는 이후 많은 장르의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영화로는 우디앨런(Woody Allen)의 <슬리퍼>(Sleeper 1, 1973)나 , 존 크로포드(Joan Crawford)의 <제인의 말로 포스터>(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1962)가 있고, 1980년대 방송에도 캐릭터로 등장하고 1990년대 유명 록커인 매튜 스위트(Matthew Sweet)의 앨범 표지, 만화영화 시리즈 <더 파워퍼프 걸스>(The Powerpuff Girls)은 캐릭터도 마가렛의 작품에서 차용했지만 킨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할 만큼 꾸준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마가렛의 빅 아이즈는 인형으로도 만들어졌는데 <리틀 미스 노 네임>(Little Miss No Name)과 1960년대 미국 몽고메리백화점과 시어즈에서만 한정 판매되었던 <새드아이 수지>인형이 그것이다.
우디 알렌의 <슬리퍼>
매튜 스위트의 앨범 표지
이 영화를 만든 팀 버튼 역시 마가렛의 작품을 수집했고 여자 친구였던 리사 마리 스미스와 미국의 모델과 여배우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부탁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 그는 어린 시절에 본 빅 아이즈가 자신의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왔다. 그의 초기작품 <스테인보이>, <빈센트>(1982)부터 최신작 <프랑켄위니>(1984) <다크 섀도우>(2012)까지 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유난히 큰 눈을 지녔다.
마가렛 킨의 작품을 보고 있는 팀 버튼 감독
그러나 영화는 팀버튼 특유의 냉소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마가렛이 자신의 작품이 월터의 것이 되어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 때문에 자존감과 죄책감사이에서 갈등할 때 슈퍼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 그들의 눈이 빅 아이즈의 주인공처럼 비현실적으로 큰 눈이 되는 모습을 자신의 영화라는 표시처럼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