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준모(문화정책, 미술비평)
구원의 어머니, 자비의 어머니
제 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Leone d'Oro)을 수상하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김기덕 감독(1960~ )의 영화 <피에타>(2012년 작). 이 수상을 계기로 평소 관객다운 관객한번 제대로 모으지 못하며 영화계 변방과 문화계 외곽에 존재했던 김기덕은 한국 영화계와 1000만 관객몰이 놀음에 빠져있는 문화적 획일주의에 대해 통렬하게 한방 먹였다.
아니 그의 한 방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것을 우리만 몰랐던 셈이다. 왜냐하면 외국의 관객들과 국제적인 영화계 인사들에게 그는 이미 명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수상을 보며 외국에서 인정받아 역수입되어야만 문화계의 거목이 될 수 있다는 한국문화계의 부박한 공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아니 그의 한 방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것을 우리만 몰랐던 셈이다. 왜냐하면 외국의 관객들과 국제적인 영화계 인사들에게 그는 이미 명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수상을 보며 외국에서 인정받아 역수입되어야만 문화계의 거목이 될 수 있다는 한국문화계의 부박한 공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영화의 제목인 ‘피에타’는 라틴어의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에서 비롯된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의미하며 그 뜻은 ‘자비를 베푸소서’이다.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지그시 내려다보는 모습을 담은 모습의 조각이나 회화작품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먼저 보낸 자신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그럼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아들을 죽인 세상의 모든 것을 품어 안고 용서하는 듯 한 그 모습은 우리에게 ‘어머니’라는 종잡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교차하는 어머니 이상의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실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를 안고 비탄에 잠긴 모습들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제작된 것은 13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저녁기도상이라는 의미의 베스퍼빌트(Vesperbild)가 그것으로 기독교의 신비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들의 주검을 내려다보는 성모의 심정은 다음과 같았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이리저리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얼굴과 머리를 바라본 마리아는 가시관의 흉터를, 쥐어뜯긴 턱수염을, 침과 피로 더러워진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중략 ‘무릎에 앉고 있는 나의 아들아, 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네 자신을 희생하였구나. 나는 기뻐해야 할 이 구원의 행위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구나.”
그리스도의 얼굴과 머리를 바라본 마리아는 가시관의 흉터를, 쥐어뜯긴 턱수염을, 침과 피로 더러워진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중략 ‘무릎에 앉고 있는 나의 아들아, 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네 자신을 희생하였구나. 나는 기뻐해야 할 이 구원의 행위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구나.”
Vesperbild 잘츠부르크 1390년경
Giovanni Bellini, Dead Christ Supported by Two Angels (Piet) (c. 1460), Museo Correr, Venice
루벤스 <피에타와 성 프란체스코> 1624 벨기에 왕립미술관
이런 피에타 상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수많은 걸작을 낳았다. 김기덕의 <피에타>도 그 계보를 잇는 명작의 리스트에 하나를 더 한 셈이다. 영화는 휠체어를 탄 젊은 청년이 쇠갈고리로 자살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김기덕 특유의 잔인함이 덜어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보다가 언뜻 고개를 돌리게 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치밀하다. 아니 예사롭지 않은 부분들이 커트커트 지나가면서 부분에 몰입을 하다보면 어느새 영화의 커다란 줄기와 만나게 된다. 마치 정교하게 마무리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처럼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채업자들의 돈을 받아 내거나 채무자에게 상해를 입혀 보험금이라도 타내는 악덕 아니 악한 이강도(이정진 분)는 어느 날 문득 어렸을 적 자신을 버렸다며 “널 버려서 미안하다.”고 찾아 온 미선이라는 이름의 어머니(조민수 분)를 만난다. 하지만 강도는 그런 낯설어 하며 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채업자들의 돈을 받아 내거나 채무자에게 상해를 입혀 보험금이라도 타내는 악덕 아니 악한 이강도(이정진 분)는 어느 날 문득 어렸을 적 자신을 버렸다며 “널 버려서 미안하다.”고 찾아 온 미선이라는 이름의 어머니(조민수 분)를 만난다. 하지만 강도는 그런 낯설어 하며 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화 <피에타> 장면. 어느날 널 버려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며 엄마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처음 받아보는 선물, 가족이라는 울타리,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 엄마와의 외출 등을 통해 점차 어머니를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이런 강도의 심경의 변화를 감독은 생명력 넘치는 장어를 통해 또는 유치한 플라스틱 안경을 통해 드러낸다. 어찌 보면 사악하고 무지한 강도가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변해가고 세상과 사람 그리고 생명과 사랑에 눈을 떠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변화하는 자신을 느끼며 섬 듯할 만큼 놀란다. 아기를 임신한 젊은 채무자를 대하면서 생명, 부모라는 존재를 떠올리고 어머니와 외출해서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뛰놀다 이를 유치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남자에게 달려든다. 강도는 이렇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양면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김기덕의 장기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변화하는 자신을 느끼며 섬 듯할 만큼 놀란다. 아기를 임신한 젊은 채무자를 대하면서 생명, 부모라는 존재를 떠올리고 어머니와 외출해서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뛰놀다 이를 유치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남자에게 달려든다. 강도는 이렇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양면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김기덕의 장기이다.
그리고 결국 강도는 “불안해.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 다시 혼자가 되면 못살 것 같아”라는 지경에 이른다. 피붙이 하나 없이 자란 강도가 30이 되어 차음으로 자신 외에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사회생활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순간이다. 강도도 그렇다. 그는 살기위해 악을 행했고 그 악행을 당한 사람들은 그를 저주하고 복수를 꿈꾼다.
그의 어머니를 자처한 미선도 그런 인물 중 한명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강도를 품안에 넣은 미선은 끊임없이 그를 아픔과 고통으로 몰아간다. 강도에게 아들을 잃은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독하게 악으로 버텨온 강도에게는 없을 것 같았던 여린 면모를 발견하고 갈등을 하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를 자처한 미선도 그런 인물 중 한명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강도를 품안에 넣은 미선은 끊임없이 그를 아픔과 고통으로 몰아간다. 강도에게 아들을 잃은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독하게 악으로 버텨온 강도에게는 없을 것 같았던 여린 면모를 발견하고 갈등을 하기도 한다.
영화 <피에타> 장면. 잠든 아들을 어루만지는 엄마
“왜 그랬어. 왜 그렇게 잔인했어.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하지만 강도가 살아온 인생이 보면 왜 그렇게까지 악하게 잔인하게 살아왔을까하며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미선은 “근데 왜 이렇게 슬프니? 이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불쌍해. 강도 불쌍해”라고 울면서도 복수를 해야하는 처지를 생각하면 정말 답이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정이란 것을 처음 알고 느끼면서 그 극악무도한 강도에게서 순수하게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연민을 느끼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를 해야하는 것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지는 미선은 사실 선과 악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을 하게한다.
사실 주인공 이강도가 좀 더 낳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그가 어머니의 정을 알고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면 그에게 조금이라도 신이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는 최소한 영화에서처럼 최악의 악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이란 것을 처음 알고 느끼면서 그 극악무도한 강도에게서 순수하게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연민을 느끼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를 해야하는 것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지는 미선은 사실 선과 악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을 하게한다.
사실 주인공 이강도가 좀 더 낳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그가 어머니의 정을 알고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면 그에게 조금이라도 신이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는 최소한 영화에서처럼 최악의 악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피에타를 주제로 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최고라 칭하는 것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의 <피에타>이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체념과 슬픔을 넘어선 표정과 무릎 위에 늘어진 그리스도의 모습이 대비되어 처연하기 까지 한 어머니의 모습은 인간을 초월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현실감이 떨어진다.
미켈란젤로 Pieta 1498 ~99, 대리석, 174x195cm, 베드로 성당, 바티칸
조각상의 구도를 보면 성모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는 삼각구도이다. 따라서 아래서 올려다보면 원근에 의해 성모가 작게 보일 것을 염두에 두고 성모를 예수보다 훨씬 크게 조각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천재적 감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작품이기 때문에, 90도 각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신체비율이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전해지는 이야기지만.
특히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아들인 예수보다 젊게 만들어졌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기를 쓴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 1525~1574)에게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피에타가 더욱 더 유명해진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들 중에서 그의 서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어깨띠에 “MICHAEL·ANGELVS· BONAROTVS· FLORENT·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넣었다.
조르조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의하면 피에타가 처음 공개됐을 때 롬바르디아 출신의 2류 조각가가 만든 작품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이에 미켈란젤로가 화가 나서 밤중에 몰래 성당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겼지만, 뒷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이후에는 자신이 만든 어떤 작품에도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르조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의하면 피에타가 처음 공개됐을 때 롬바르디아 출신의 2류 조각가가 만든 작품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이에 미켈란젤로가 화가 나서 밤중에 몰래 성당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겼지만, 뒷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이후에는 자신이 만든 어떤 작품에도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736년 한 남성에 의해 성모의 왼쪽 손가락이 깨져 주세페 리리오니(Giuseppe Lirioni)가 깨진 부분을 갈아서 접합시켰고 1972년에는 헝가리 출신의 한 남성이 망치로 내려쳐 엄청나게 손상되었다. 이후 복원작업을 거쳐 지금은 방탄유리 상자 안에서 관객들을 맞고 있다. 이후 세계 각지에 피에타의 복제품을 모셨는데 바티칸의 감수를 받은 정교한 복제품 중 하나가 2001년 천주교 수원교구 분당 요한성당에 설치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천상의 성모와 예수를 그렸다면 다음 시대를 살았던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피에타>는 오히려 인간적이다. 하지만 가장 인간적이며 김기덕의 피에타와 가장 근접한 피에타 상이 있다. 그것 또한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로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꽤 여러 점의 피에타 상을 제작했는데 그가 죽기 전까지 정과 망치를 들고 돌에 들어있는 형상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기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으로 현재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 있는 일명 <론다니니의 피에타>(1552~ 64, 대리석, 높이 195cm)이다. 바로 피에타 상이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와 궤를 같이한다.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로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꽤 여러 점의 피에타 상을 제작했는데 그가 죽기 전까지 정과 망치를 들고 돌에 들어있는 형상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기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으로 현재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 있는 일명 <론다니니의 피에타>(1552~ 64, 대리석, 높이 195cm)이다. 바로 피에타 상이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와 궤를 같이한다.
베르니니Bernini, <피에타>
미켈란젤로 Piet Rondanini, 1552
김기덕 감독은 영화 피에타의 영감을 얻기 위해 베드로 성당을 두 차례나 찾았다고 하지만 영화 <피에타>는 <론다니니의 피에타>와 닮아있다. 바로 그것은 베드로 상당의 피에타가 초극, 초월적인 어머니의 모습이라면 론다니니 피에타의 성모는 ‘어미’인 때문이다.
아들을 여윈 어머니의 인간적이고 고통스런 모습이 여전히 미켈란젤로의 완성을 기다리면서 비탄에 빠진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아들의 부활을 기다리고 믿는 표정으로 아들을 등 뒤에서 안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어머니를 닮은 때문이다.
아들을 여윈 어머니의 인간적이고 고통스런 모습이 여전히 미켈란젤로의 완성을 기다리면서 비탄에 빠진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아들의 부활을 기다리고 믿는 표정으로 아들을 등 뒤에서 안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어머니를 닮은 때문이다.
우리의 어머니는 때로는 우리에게 영원한 여인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꾸짖고 잘못 했을 때 그윽하게 바라보고 측은하게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되려 혼내고 소리 지르고 가끔은 손찌검도 하는 어머니, 자식의 잘못을 감싸 안고 인간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어머니, 그러다 복 받치는 설움과 실망 때문에 스스로의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오열하는 어머니가 불효막심하고 속만 썩혀드린 우리 자식들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영화로 돌아오자. 피도 눈물도 없이 채무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강도’(이정진 분)와 피붙이 하나 없이 자신의 잔혹함만을 무기로 외롭게 살아온 그에게 어느 날 문득 다가온 ‘엄마’(조민수 분). 어머니라는 그 여인을 의심하면서도 진짜 어머니이기를 바라며 그 ‘어머니’에게 빠져드는 강도. 그런데 어머니는 어느 날 사라지고 그 어머니가 ‘어미’가 되었던 사연들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결코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임이 드러난다.
하지만 김기덕은 피에타상의 성모 아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늘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통렬하지만 나직하게 투박한 질 그릇 같은 소리로 기도한다. 마치 론다니니의 피에타에 남겨 둔 미켈란젤로의 손 맛처럼. “신이시여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와 더불어 우리도 속죄해야 한다. 야만의 세계를 살아내기 위해 야만의 길을 택해야했던 영화 속 강도와 감독 김기덕에게 말이다.(*)
하지만 김기덕은 피에타상의 성모 아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늘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통렬하지만 나직하게 투박한 질 그릇 같은 소리로 기도한다. 마치 론다니니의 피에타에 남겨 둔 미켈란젤로의 손 맛처럼. “신이시여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와 더불어 우리도 속죄해야 한다. 야만의 세계를 살아내기 위해 야만의 길을 택해야했던 영화 속 강도와 감독 김기덕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