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시각문화비평)
가벼운 것이 대세인 세상이다. TV의 교양프로그램이라는 ‘생 쑈’도 알고 보면 출연자들의 한없이 가벼운 입담에 의존할 뿐이다.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가볍기 그지없는 것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가벼우면서도 진중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묵직하다. 게다가 요즘 보기 드문 문학적인 대사에, 할리우드 사상 최고의 초호화 캐스팅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마치 자로 잰 듯 한 연기와 동선이 제대로 된 한정식을 받은 느낌이 드는 영화이다. 하긴 이런 영화에 감동을 받고 잘 만든 영화라고 할 만한 기억을 가진 이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옛날 영화의 잡담보다는 이야기가 있는 스타일의 영화를 추억하고 상기시키는 그런 점에서 올드 팬을 향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층이 이 영화를 보면 중장년층들의 영화에 대한 기회와 취향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현재를 사는 소녀가 어린이 드라마에서처럼 그냥 ‘작가’로 불리는 흉상 앞에서 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펼쳐들면서 1985년을 살고 있는 중년의 작가(톰 윌킨슨 분, Tom Wilkinson, 1948~ )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1968년 흉물로 변하기 직전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젊은 시절 작가(주드 로 분, Jude Law, 1972~ )가 호텔 주인인 무스타파(F. 머레이 에이브러햄 분, F. Murray Abraham, 1939~ )로부터 이 호텔을 물려받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고 또 그 안에 이야기가 전개되는 구조이다.
영화는 갑자기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급속도로 진행된다. 하지만 미스터리 영화라기보다는 행간의 의미가 더 중요한 대사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듣고 보아야 하는 영화이다. 영화속 시대적 배경은 유럽에서 파시즘이 태동하던 1932년, 주브로브카 공화국(Zubrowka)이라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이다. 알프스 산 어귀의 온천관광지에 세워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세계 최고 갑부인 84세의 ‘마담 D’(틸다 스윈튼 분, Tilda Swinton, 1960~ )’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다녀간지 얼마 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된다.
그녀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연인이던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분, Ralph Fiennes, 1962~ )에게 상속하다는 유언을 남긴다. 마담 D.의 유산을 노리고 있던 그의 아들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 분, Adrien Brody, 1973~ )는 구스타브를 살인을 저지른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구스타브는 충실한 호텔 로비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 분, Tony Revolori, 1996~)’와 함께 누명을 벗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모험은 시작되고, 험악한 아들 드미트리는 그림은 물론 호텔까지 차지하려고 무자비한 킬러 ‘조플링’(윌렘 대포 분, Willem Dafoe, 1955~ )’을 고용해서 그의 뒤를 쫒는다. 킬러와 헌병대 대장 헨켈스(에드워드 노턴 분, Edward Norton, 1969~ )의 추격을 받는 동시에 세계 콘시어지의 모임인 십자열쇠협회 회원 아이반(빌 머레이 분, Bill Murray, 1950~ )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제로와 얼굴에 큰 점이 있는 멘들스 빵집의 제빵사 아가사(시얼샤 로넌 분, Saoirse Ronan, 1994~ )와 사랑이야기도 양념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 나타나는 것은 파시즘의 그늘이다. 나치 친위대 문양을 패러디한 번개모양의 두 줄이 그려진 휘장을 단 군대가 출연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결국 비극을 야기한다. 수많은 죽음, 그리고 이렇게 쫒고 쫒기는 과정에서 허구와 현실이 교차하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그렇게 심각하게 그리지 않는다. 굉장히 무거울 수 있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볍게 애완동물의 죽음으로 대체시킨다. 킬러 조플링이 마담 D의 변호사(제프 골드블럼 분, Jeff Goldblum, 1952~ )가 키우는 페르시아 고양이를 창문 밖으로 내 던지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한사코 보도 블럭 위에 추락한 죽은 납작한 고양이의 시신을 롱 테이크로 잡고있다. 이후 변호사, 여동생 등의 죽음이 이어진다. 하지만 길게 애통해 하지 않는다. 쫓고 쫓기는 영화의 속도는 이들의 죽음을 지나친다. 이런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인공 로비보이 제로가 애거사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대목을 이야기하려다 그만두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훗날 그녀와 갓난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내레이션으로 간단히 처리하고 만다. 제로를 지키려다 구스타브가 맞이한 슬픈 결말도 마찬가지다. 마지막까지 코믹한 B급 감성으로 유지할 셈인지 감독은 관객들에게 죽음에 대한 애도의 기회조차 박탈하려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러시아 전통춤을 추는 귀여운 애니메이션을 등장시킨다.
구스타프와 제로. 뒤에 클림트 작품이 보인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 나타나는 것은 파시즘의 그늘이다. 나치 친위대 문양을 패러디한 번개모양의 두 줄이 그려진 휘장을 단 군대가 출연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결국 비극을 야기한다. 수많은 죽음, 그리고 이렇게 쫒고 쫒기는 과정에서 허구와 현실이 교차하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그렇게 심각하게 그리지 않는다. 굉장히 무거울 수 있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볍게 애완동물의 죽음으로 대체시킨다. 킬러 조플링이 마담 D의 변호사(제프 골드블럼 분, Jeff Goldblum, 1952~ )가 키우는 페르시아 고양이를 창문 밖으로 내 던지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한사코 보도 블럭 위에 추락한 죽은 납작한 고양이의 시신을 롱 테이크로 잡고있다. 이후 변호사, 여동생 등의 죽음이 이어진다. 하지만 길게 애통해 하지 않는다. 쫓고 쫓기는 영화의 속도는 이들의 죽음을 지나친다. 이런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인공 로비보이 제로가 애거사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대목을 이야기하려다 그만두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훗날 그녀와 갓난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내레이션으로 간단히 처리하고 만다. 제로를 지키려다 구스타브가 맞이한 슬픈 결말도 마찬가지다. 마지막까지 코믹한 B급 감성으로 유지할 셈인지 감독은 관객들에게 죽음에 대한 애도의 기회조차 박탈하려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러시아 전통춤을 추는 귀여운 애니메이션을 등장시킨다.
삶과 죽음의 교차점 조차도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1969~ ) 감독은 교묘하게 현실은 허구처럼, 허구는 현실처럼 뒤바꿔놓는 재주를 부린다. 그래서 영화는 유럽의 지적인 예술영화처럼 보인지만 내용은 미국영화의 B급 감성 양념을 쳐 코미디로 풀어나간다. 게다가 영화의 장면장면은 예쁜 동화처럼 알록달록한 색감과 장식적인 미술과 패션, 판타지적 미장센으로 치장되어 한 편의 판타지 영화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영화는 매우 영화답다. 즉 현실적이기보다는 동화 속이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현실적이지 않다. 영화의 장면은 한 컷 한 컷 넘어갈 때마다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마치 환등기로 영화를 빠르게 비추어 보는 듯 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모든 장면은 치밀하게 계산되어 화면에 드러난다. 모든 장면은 좌우대칭이며 모든 소품들은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정교하고 앙증맞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과 소품 그리고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모두 하나하나가 모두 정교하게 디자인이 되고, 계획되고 제작되어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맞아 돌아간다. 그래서 영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현실세계를 보여준다. 물론 영화의 도입부에 ‘주브로브카’라는 허구의 나라에서의 일임을 밝히면서 시작하지만 영화는 묘하게도 허구적이면서도 전혀 허구적인 느낌을 들게 하지 않는 묘한 반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영화의 이런 묘한 부조화는 사소한 소품 하나하나에서부터 캐릭터와 시대, 역사까지 촘촘하게 계획하고 이를 완벽하게 아름다운 상상 속에서 하나의 세계로 마치 아름다운 색을 지닌 털실로 뜨개질한 스웨터처럼 치밀하게 짜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컷 한 컷이 모두 독자적인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들이 조금은 각각 떨어진 듯 이어지면서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그래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이며, 허구적이면서 사실적이다. 그 묘한 간극을 관객들은 넘나들면서 다른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른 감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그의 영화적 치밀함은 화면의 비율에서도 나타난다. 영화 속 시대에 유행하는 패션, 소품, 인테리어, 관습 등을 재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작품에서 한 발짝 떨어져 영화 밖의 인물이 영화를 설명해서 객관적인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언제나 경쾌한 음악이 함께해서 비현실적인 만화처럼 과장될 때도 있지만 바로 그 기상천외한 그의 과장의 폭이 관객의 상상력과 오감을 자극한다.
여기에 영화는 '시간'을 화면의 비율로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최근의 영화 화면비율 인 1.85:1을 유지하지만, 제로와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그린 1932년 그리고 제로가 늙어 무스타파가 되어 젊은 작가와 만나는 1968년, 그리고 다시 이 만남을 노작가가 회상하는 1985년과 극중 소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읽는 독자가 등장하는 현재 등 각각의 시대에 사용되던 화면비율인 1.33:1부터 1.85:1까지 다양한 화면을 구사해서 그 시대의 상황과 분위기, 예술적인 감각 등을 완벽하게 화면으로 다시 불러낸다.
기상천외하고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자아내는 묘한 부자연스러운 현실감 또는 기시감으로 인해 속도감 있는 기상천외한 사건의 전개와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한다.
특히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그래픽 디자이너 애니 앳킨스(Annie Atkinds, 1956~ )가 일일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타자기와 손으로 만들어낸 아날로그 식 디자인도 볼거리다. 영화의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된 아름다운 핑크색 ‘멘들스’ 케이크 상자,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소설표지, 잉크와 펜을 사용해 직접 손 글씨로 완성한 ‘마담 D’의 편지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국가 ‘주브로브카의 여권과 사소한 신문조각, 경찰서에 사용되는 문서에 이르기까지 웨니 앤더슨 감독이 생각한 내용을 담아 완벽한 근대 그래픽기법을 재현해 놓았다. 이런 글자에 대한 감독과 디자이너의 집착은 영화 속 문학적인 대사와 아주 잘 맞아떨어져 마치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게다가 84세의 세계 최고의 부자인 노 마담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은 이 배역을 위해 매일 5시간씩 분장을 했다고 하니 감독이 아니라 장인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영화의 철저함과 엄격함은 소품을 만드는 데 들이는 공에 비례하지만 그의 영화 장인으로서의 철저함을 구현하는 데는 바로크주의와 아르누보 풍의 카페트 등 동유럽의 전성기를 재현한 영화세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명화 <사과를 든 소년>도 완벽하게 재현된 플랑드르 화파의 사실주의에 입각한 회화의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작가의 이름까지 더 영거 요하네스 반 호이틀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고 있어 더욱 실제로 북유럽 르네상스기에 활동했던 화가라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 그림은 감독의 요청에 의해 마이클 테일러(Michael Taylor, 1952~ )라는 영국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피렌체 화파의 브론치노(Agnolo Bronzino, 1503~72)가 그린 초상화들과 형식적으로 매우 흡사한 구성을 지닌다. 이는 감독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그림이 아니고 그보다는 동쪽 지역 그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고 하니 정말 웨스 앤더슨은 별걸 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챙기는 소심한(?) 또는 섬세한(?) 남자인 셈이다.
극중에서 상속받은 그림 <사과를 든 소년>을 훔치고 걸어두는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풍의 그림도 완벽한 감독의 발명품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의 실존이 뒤엉켜 죽음과 에로티시즘이 공존하는 충격적이고 매혹적인 실레의 모작은 화가 리치 펠레그리노의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소품들 중 여행용 가방은 프라다의 도움을 받았다. 1920~30년대가 영화의 배경인 때문에 당시 출시됐던 프라다 빈티지 모델을 바탕으로 30년대 부유한 귀부인이 여행할 때 필요한 트렁크를 새로 디자인해 달라고 해서 탄생했다. 프라다는 나무 프레임을 바탕으로 낡은 느낌을 더한 소가죽으로 마무리한 뒤 핑크 새틴으로 안감을 장식하고 마담 D의 이니셜인 ‘Mdm. C.V.D.u.T’를 정성스레 새겨 넣었다. 여기에 무자비한 킬러 조플링의 검은 가죽재킷도 역시 프라다의 손을 빌었다.
영화는 그랜드 부타페스트호텔의 외양처럼 핑크 빛으로 보이지만 실은 영화속 소품과 장소, 의상 하나하나가 영화 속 인물 전체의 개성과 관계, 혹은 갈등을 나타내는 아주 정교한 이음매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영화 속 장면 장면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조금 거칠고 생경하게 이어지면서 또 다른 한편의 그림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