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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로자와 아키라의 <꿈>과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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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준모(문화정책, 인디펜던트 큐레이터)

 꿈이란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현실처럼 생생하게 행동하고 기억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끔을 통해서 이루기도 하고 꿈속에서 경험했던 일들 때문에 깨어나서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꿈속에서건 현실에서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나 희망하는 것만을 기억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고 싶은 것 좋은 것만 꿈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힘든 것, 어려운 것들이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경우 이런 일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사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안도한다. 물론 꿈이란 극도로 개인적인 영역이라서 자신이나 주변에 국한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론 나라나 인류라는 거대한 꿈을 꾸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꿈은 현실과 이상, 존재와 비존재를 드러내는 좋은 방편이기 때문에 소설이나 영화 또는 음악이나 미술에서 수 없이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구로자와 아키라 <꿈> 프랑스어 포스터. 


  이런 꿈을 다룬 영화 중 아무래도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Akira Kurosawa, 1910~98)의 <꿈>(夢: Yume, Dreams, 1990년작)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꿈이라기보다는 아키라 감독의 성장 소설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 꿈의 개인적이면서 서사적이며 거대담론에 이르는 장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덟 개의 꿈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영화의 화자이다 주인공은 아키라 본인이다. 1화 인 여우가 시집가는 날 이야기를 다룬 ‘여우비’를 시작으로 2화 복숭아 밭 이야기 그리고 세 번째 등산길에서 조난을 면하는 ‘눈보라’이야기 4화, ‘터널’을 통해 전쟁을 다룬 이야기, 5화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전시회에서 고흐를 만나는 ‘까마귀’이야기, 6화 핵발전소가 파괴되고 죽기와 죽음을 연장하려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후지산’, 7화 세상이 멸망하고 도깨비들만 사는 ‘귀신들이 울부짖는다.’ 8화 도원경 같은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이야기 등으로 이어지면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순리 그리고 인간과 욕심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때로는 사무라이처럼 난폭하게 또 때로는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처럼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말이다. 



<꿈>의 장면들


 화가를 꿈꾸다 무성영화의 변사였던 셋째 형의 영향으로 27살에 뒤늦게 영화 조감독이 되어 33살에 <스가타 산시로〉(1943년)로 데뷔한 구로자와 아키라는 베니스영화제를 비롯, 베를린영화제, 미국 아카데미상, 칸느 영화제 등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쥔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일본영화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명장으로 “내 머리 속에는 일본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동거하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일본을 넘어선 연출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감독으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구로자와 아키라


 그의 영화는 매우 남성적이며 선이 굵고 다이내믹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매우 여리고 섬세한 성품을 지녔던 그는 1971년 12월 22일 자택에서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한다. 물론 일찍 발견되어 목숨은 건졌지만. 그를 괴롭혔던 1967년 미국 영화 〈토라! 토라! 토라!>와의 사건, TV 영화의 부조리, 구로사와 프로덕션의 적자 문제와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영화를 촬영할 수 없었던 일등이 그를 자극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사실 그를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은 <데루스 우잘라>(1975)는 소련, <란>(1985)은 프랑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꿈>(1990)은 미국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비를 지원했다. 세계가 구로자와를 명장으로 치켜세울 때 일본은 거꾸로 구로사와를 짐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제 와서는 그를 ‘영화의 천황’이라고 칭송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의 영화 <꿈>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탐미주의를 통한 일본적 아름다움에 대한 확실한 집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8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듯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자만 실은 모두 연결되어있다. 여우가 시집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극단적인 설정으로 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또 복숭아 밭 이야기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책임을 지지 않으면 자연이 복수를 할 수도 있다는 설정은 역시 초자연적이다. 그리고 이런 자연의 인간에 대한 복수의 가능성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다섯 번째 가장 몽환적인 에피소드인 한 사내가 고흐의 전시회에서 고흐의 그림 안으로 들어가 고흐를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고흐의 그림이 현실이 되는 부분, 그리고 현실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고흐의 붓 터치들은 이 꿈의 탐미적 성격을 아주 잘 드러내는 동시에 색채와 빛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기 위해 고흐를 만난다. 


<꿈>의 한 장면


 그는 고흐를 찾아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작은 마을 아를(Arles)의 도개교와 빨래터를 찾고 그곳에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 고흐를 만난다. 고흐에게 아를은 화가로서 최 전성기를 맞은 곳이자 보낸 곳이기도 하다. 1888년 2월 생활고에 실연의 아픔으로 시달리던 고흐는 로트렉의 권유로 아를에 도착해서 뒤 늦게 합류한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함께 살기도 했던 ‘노란 집’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파리 시절에 이론적으로 정리했지만 주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그의 전형적인 화법으로 완성된다. 
 그는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햇빛을 사랑했고 이곳에 머무는 15개월 동안 200여 점의 그림을 완성한다. <해바라기> 연작과 아를의 론 강에 별이 빛나는 그린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테라스>등도 모두 이곳에서 그려진 그의 대표작이다.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캔버스에 유화, 80.7cm × 65.3cm, 1888, 크뢸러뮐러미술관



 그의 그림 속 ‘노란카페’가 있는 리퍼블릭 광장과 고흐가 입원해 있던 정신병원이 여전히 우리를 맞는다. 그리고 그곳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다. 지금은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들이 전시되고 신진 작가들이 발굴되는 고흐문화센터(Espace Van Gogh)로 운영 중이다. 또 영화에 나오는 도개교도 볼 수 있다. 물론 현재의 도개교는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도개교는 아니다. 전쟁으로 파괴된 때문이다. 현재의 도개교는 원래의 위치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남쪽 하류에 있는데 전란을 피해 남아있던 단 하나의 목재 도개교를 고흐의 “아를의 도개교”로 복원한 것이다.


반 고흐 <아를 병원의 정원> 캔버스에 유화, 73 x 92 cm, 1889, 오스카라인하르트 컬렉션





도개교의 모습과 반고흐의 그림


 고흐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랑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아를로 이주했다. 그는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전체적으로 색채가 상호상승작용을 일으키도록 보색을 병치해서 사용하면서 순수하고 강력한 원색으로 그림을 그려나갔고 대상의 자연적인 색을 넘어서 과장된 색채를 사용했다.
그는 그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나는 색채의 위치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자연으로부터 일련의 순서와 정확성을 받아들였어. 나는 무의미한 짓을 하지 않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지. 내가 사용한 색이 내 그림에서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이 사물의 색과 동일한 색인지하는 문제는 더 이상 내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는 원색을 과하게 쓰지만 결코 그림이 야하거나 포스터처럼 장식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중간색을 가지고 원색과 원색의 경계에 조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빠르고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는 그의 창작욕과 발현이자 직접적인 표현수단으로 이런 속성의 특성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빠르고 즉흥적인 그림은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가 그림을 빠르게 그렸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는 법은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구상을 끝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연습과 준비를 했다. 또 그는 기억이나 생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거의 언제나 소재를 눈 앞에 두고 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대상의 형태를 종종 심하게 변형 또는 왜곡시켰지만, 여전히 자연에 충실해서 추상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물감을 기름을 섞지 않고 튜브에서 나온 그대로 걸쭉한 상태로 사용했으며 가끔은 튜브에서 물감을 직접 짜 화폭에 바르기도 했다. 두껍게 발린 물감으로 인해 붓 자국은 입체적으로 보인다. 또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드러난다. 


 천형을 지고, 지상에 유배를 온 천사 고흐의 열정이 그대로 녹아 흐르는 아를과 도개교를 둘러보면 마치 이젤 등 화구를 둘러맨 고흐가 다가와 말을 걸 듯 느껴진다. 물론 꿈이겠지만 말이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 의하면 꿈에는 자면서 꾸는 꿈과 대낮에 꾸는 ‘백일몽’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술은 백일몽의 하나로 간주한다. 그런 점에서 그림과 영화는 가장 현실적인 허구로 잠시의 위안은 줄 수 있다. 구로자와도 고흐도 백일몽의 세계에서는 성공했지만 인간으로서 현실에서는 실패했다. 그런 점에서 현실은 참으로 언제나 엄중하다. 
글/ 정준모 관리자
업데이트 2024.12.0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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