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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관, 위안의 피난처 -<뮤지엄 아워스>와 브뤼겔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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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인디펜던트 큐레이터)

 어려운 일이나 피곤한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어딘가 편한 곳을 찾기 마련이다. 영화 <뮤지엄 아워스>에서의 피난처는 미술관이다. 위안이 되고 무언가 버거운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 수많은 사람들의 닳고 닳은 삶들이 기록된 그림들 사이로 또 다른 사람들이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분주하게 때로는 무망한 표정으로, 그림을 보는 일상 아닌 일상 속, 시간이 멈추어 선 곳, 그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캐나다에 사는 앤(Mary Margaret O'Hara 분, 1984~ )은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에 살고있는, 아니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왕래가 없었던 사촌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받는다. 보호자조차 제대로 없는 사촌 때문에 갑자기 비엔나에 오게 된 앤은 낮선 도시 풍경들이 두렵거나 외로우면 조용히 미술관을 찾는다. 그리고 정년퇴직을 하고 미술관의 가드로 근무하던 요한(Bobby Sommer)의 눈에 의해 발견된다. 음악 사업을 하다 나이를 먹자 이를 접고 미술관에서 그림과 관람객들을 관찰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살던 그에게 미술관에서 유독 오랜 시간을 보내는 낯선 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는 두 사람의 뜻밖의 만남을 통해 전개된다. 미술관과 비엔나라는 도시를 표류하듯 방황하는 두 사람을 카메라는 정교하게 따라붙으며 미술품과 일상적 풍경 사이를 마치 슬라이드 쇼처럼 교차하거나, 분할된 화면에 동시에 드러내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관객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쓰이는 이런 기법은 영화감독보다는 비디오아티스트로 더 잘 알려진 감독 젬 코헨(Jem Cohen, 1962~ )의 경력 때문이다. 그는 뉴욕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과 멜버른스크린갤러리(Melbourne's Screen Gallery)에 미디어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작가이다. 2010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서울 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에 <패티 스미스의 기억>이 상영되기도 한 젬 코헨은 도회의 거리를 담은 영상, 인물화와 음향 등을 모은 자신의 아카이브의 자료를 이용해 작품을 만든다. 그의 영화와 설치미술 작품들은 주로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해서 영화도 미술도 음악도 아닌 중간영역으로, 16밀리나 슈퍼 8밀리 홈무비, 비디오 등의 미디어를 사용해 만들어진다. 그는 중심과 주변, 전경과 후경을 수시로 바꾸는 기법을 통해 주변과 중심을 뒤섞어 놓는데, 영화 <뮤지엄 아워스>에서도  카메라의 프레임은 액자가 되고 액자 속 그림의 주인공이 움직이는 화면 구조를 지닌다. 따라서 영화 속 일상과 그림은 일상의 삶인 동시에 삶 너머이기도 하다.   


 요한이 근무하는 미술관은 1891년 개관한 세계적인 미술품과 보물들로 가득한 빈 미술사미술관(Kunst Historisches Museum Wien). 독일의 건축가 G.젬퍼(G. Semper, 1803~79)가 설계한 석조건물에 빈을 수도로 600년간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 Haus)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Leopold Wilhelm, 1626~71)이 수집한 약 40만점의 미술품을 기반으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보석 같은 작품이 가득해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빈 미술사 미술관


 영화의 배경이 미술관이다 보니 그림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에 가깝다. 그림은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중심으로 들어온다. 병문안을 함께 간 요한은 앤의 부탁으로 코마상태의 환자를 두고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의 <자화상>과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의 <여름> 그리고 파티니르(Joachim de Patinir, 1485?-1524)의 <그리스도의 세례>를 이야기한다.  파산 후 궁핍하고 쓸쓸한 노년기를 보낸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삶의 덧없음과 젊은 날의 회한을 보여준다. 아르침볼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제철 채소나 과일을 가지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 황제의 얼굴을 연작으로 그렸다. 이 중 여름은 인생의 가장 절정, 또는 건강했던 시절을 암시한다. 하지만 싱싱하다는 것은 언제든지 시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티니르는 루가복음 3장 1~18절과 21~22절을 소재로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렸다. 굽은 강과 높은 산이 어우러진 풍경을 배경으로 세례자 요한이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물로 예수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예수는 푸른색 겉옷을 벗어놓고 요르단 강에 들어가 믿음의 색인 흰색 속옷만 걸치고 세례를 받는다. 요한의 그림이야기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렘브란트 <자화상Large Self-Portrait> 1652, 유화,112 x 81.5 cm, 빈 미술사 미술관 



주세페 아르침볼도 <여름The Summer> 1563, 유화, 67X50.8cm, 빈 미술사 미술관


파티니르 <그리스도의 세례(The Baptism of Christ)> 1515~24, 유화, 60X77cm, 빈 미술사 미술관


 렘브란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이다. 아르침볼도는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으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채색하는 화가였던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그러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눈의 들어 궁정화가로 일하며 사물이나 과일, 곡식들을 조합한 인물화를 제작한다. 60세에 다시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매우 사교적이며 학식과 교양을 갖춘 화가였다. 그는 <여름>의 옷깃에 자신의 이름 ‘GIUSEPPE ARCIMBOLDO’을, 어깨에는 작품제작 연도를 그려 넣었다.
 파티니르는 네덜란드 화가로 파티니에르(Patinier) 또는 파테니에르(Patenier)라고도 불린다. 그는 주로 종교적인 주제를 다뤘는데 특히 배경인 풍경에 더 공을 들여 네덜란드 풍경화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뮤지엄 아워스>에서의 주인공은 단연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1525(30)-69)이다. 현재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네덜란드 남부에 위치했던 플랑드르 공국의 화가로 동판화 밑그림화가로 활동했던 그는 1551년 안트베르펜의 화가조합에 등록 후 이탈리아의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여행했다. 여행 중 알프스의 산중 풍경을 그린 소묘는 안트베르펜의 출판업자 히에로니무스 코크(Hieronymus Cock)에 의해 동판화집으로 출간되었고 그 후 동판화로 환상적 풍자화 시리즈를 출간해 화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초기에는 ‘민간의 전설’ 즉 속담 등을 주제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풍경 속에 박혀있는 듯 수 많은 작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점차 교묘한 대각선 구도를 통해 화면에 질서를 부여하면서 주제가 명료해지며 판화가에서 화가로 정착한다. 이후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에 대한 에스파냐의 탄압을 종교적인 내용으로 각색하여 극적으로 표현하였고, 이어서 농민 생활을 애정과 유머를 담아서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인물이 점차 커지면서 ‘농민의 브뤼겔’이 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동판화 1점을 포함, 총 45점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아들 소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de Jonge, 1564/5~1638)과 작은 아들 대 얀 브뤼겔(Jan Bruegel de Oude, 1568~1625)도 유명한 화가로 대대로 화가의 집안을 이루었다. 큰아들 소 피터 브뤼겔은 아버지처럼 같은 소재의 그림 외에 환상적이며 악마적인 내용을 즐겨 그려 ‘지옥의 브뤼겔’로, 작은 아들 얀은 화초나 풍경을 잘 그려 ‘꽃의 브뤼겔’', ‘천국의 브뤼겔’'이라 불리었다.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눈 속의 사냥꾼The Hunters in the Snow(winter)> 1565, 유화, 117X162cm, 빈 미술사 미술관


 브뤼겔의 비중은 영화도입부에서부터 확인된다. 그의 <눈 속의 사냥꾼>에서 까마귀가 나뭇가지를 차고 날아오르는 그림의 일부와 실제로 까마귀가 나는 일상이 오버랩 된다. 영화에 함께 등장하는 <우울한 날>과 <소떼들의 귀환>등은 그의 대표작인 <계절> 연작 중 일부이다. 이 연작은 브뤼겔의 후원자이자 부유한 은행가로 안트페르펜에 살았던 니콜라스 용헬링크(Nicolaes Jonghelinck, 1517~1570)가 자신의 저택을 장식하기위해 주문한 작품이다. 이후 이 작품들은 아르침볼드의 초상으로 알려진 황제 루돌프 2세(1552~1612)의 수장품이 되지만 30년 전쟁 때 프라하 약탈로 유실되고 이후 5점만 남아 전한다. 이 연작은 원래 6 개의 패널로 한 계절 당 두개씩 이루어졌을 것이라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다. 우리에게 브뤼겔의 이 그림이 익숙한 것은 1970대 초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도 달력그림으로, 카드용 그림으로 많이 사용된 때문이다.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우울한 날The Gloomy Day(beginning of Spring)> 1559, 유화, 118×163 cm, 빈 미술사 미술관


피터 브뤼겔 Pieter Bruegel the Elder <소떼들의 귀환 The Return of the Herd (Autumn)> 1565, 유화, 117X159cm, 빈 미술사 미술관


 브뤼겔의 작품에는 주인공이 없다. 아니 화면을 개미 떼처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들은 숨은그림찾기 속 인물처럼 소리 없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지지고 볶고 살아간다. 영화 속 앤과 요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그들의 존재란 안중에 없다. 주변부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중심인 그런 사람들이다. 잼 코헨은 시대와 상관없이 언제나 세상의 한 부분을 이루고 살아온 주변을 병렬 배치함으로서 삶과 사회, 삶과 죽음을 되뇌이게 한다.   

 영화의 앞부분에 나오는 그림이지만 글의 마무리를 위해 병렬배치를 해 보자. 요한은 브뤼겔의 작품에서 숨은 그림을 찾으며 소일하다 앤을 발견하고 그녀가 마음을 열게 되자 한스 멤링(Hans Memling, 1435/40~1494)의 누드화 <아담과 이브>까지 함께 보며 누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브뤼겔의 작은 아들인 얀의 <큰 꽃다발>을 본다. 화병에 꽂혀있는 꽃이란 결국 뿌리가 없는 허공 중에 떠 있는 아름다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화병 속 꽃 그림은 주로 덧없는 삶 혹은 유한한 삶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죽음은 장르를 불문하고 유럽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예술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주제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이어진다. 


한스 멤링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 1485년 경, 유화, 69.3X17.3cm(각각), 빈 미술사 미술관


얀 브뤼겔  Jan Brueghel the Elder <큰 꽃다발 The Great Bouquet> 1607, 유화, Oil on wood, 98X73cm, 빈 미술사 미술관


 결국 영화는 삶과 죽음의 간극을 그리고 삶은 그 자체로 죽음의 연속이며, 처음부터 삶 안에는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몽테뉴(Montaigne, 1533~1592)의 말처럼 일상과 영화를 버무려놓고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 존재시킨다. 이런 그의 화법은 요한을 미술관 경비원이 아니라 미술관의 그림들과 함께있는 브뤼겔의 그림 속 사람처럼 보인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최악의 영화’일 수 있고 ‘예술’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이 되는 영화로 대사보다는 화면에 집중해야 보이고 읽히는 영화이다. 단편 다큐멘터리와 미디어아트 작업을 주로 해온 젬 코헨의 일곱 번째 장편영화로, 2012년 로카르노영화제를 비롯해서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는 작품이다. 늘 익숙하게 지나치던 일상의 풍경들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가치 그리고 익숙함과 생경함을 동시에 슬며시 쥐어주며 생의 비약, 허무의 초극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래서 일상 속 미술관은 일상너머의 미술관과 같은 장소임을 알게 해 준다.  

글 정준모(인디펜던트 큐레이터)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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