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진주박물관은 국제교류전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을 오는 11월 30일(화)부터 2011년 2월 6일(일)까지 개최한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지난 2003년 상호교류를 목적으로 일본의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佐賀県立名護屋城博物館]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임진왜란사에 기초한 학술교류를 진행해왔다. 최근 2년여에 걸친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 관련 자료들의 수집과 연구성과, 그리고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의 적극적인 협력과 일본의 국등록유형문화재国登録有形文化財 등 일본 내 6개처 소장 문화재 73건 88점의 출품은 이번 국제교류전 개최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한편, 전시의 준비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 헤어진 형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홍호연(운해)의 후손들과 한국에 거주하는 성해·진해의 후손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나게 된다. 즉, 400여년 전에 헤어진 형제들의 이루지 못한 꿈을 후손들이 뒤늦게나마 이룰 수 있게 되어 더욱 뜻 깊은 전시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관련 기사 붙임1 참조)
전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조선인 포로, 시대적 배경과 실상’, 제2부는 ‘문화의 전파와 교류’, 제3부는 ‘예술로 승화한 포로의 꿈’이다.
◦ 제1부 ‘조선인 포로, 시대적 배경과 실상’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발생한 조선인 포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종전 후 조선과 일본의 우호관계가 성립되면서 이루어진 포로쇄환의 상황을 담고 있다.
일본군은 조선인 포로들을 포르투갈 노예상 등에게 팔아넘기기도 하였으며, 학자·사기장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연행하였다. 임진왜란 기간에 발생한 포로의 수는 대체로 10~40만에 달한다고 한다. 7년간의 전쟁이 종결되고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회복되어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포로의 쇄환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일본에서 가정을 꾸리거나 어릴 때 연행되어 이미 일본문화에 적응하였거나 조선에 돌아가면 다시 천대받을 것을 우려하는 등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조선으로 귀국한 포로들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 제2부 ‘문화의 전파와 교류’는 일본이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유입함으로써 중세 문화의 변화와 발전을 이룩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인 사기장의 기술과 상품성은 일본 권력층의 요구조건에 부합하였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다도茶道가 유행이었으며 아리타〔有田〕지역에서 조선 사기장에 의해 생산한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사상적으로 불교가 주류였던 일본사회에서 유학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강항(姜沆)에게 주자학을 전수 받은 후지와라 세이카는 에도유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진영·매계 부자는 와카야마 지역에서 유학자로 존경받았다. 이매계가 지은 「부모장」은 수백 년간 도덕규범으로 인식되어 유학사상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 제3부 ‘예술로 승화한 포로의 꿈’은 독특한 서체의 서예가로 명성을 날린 조선인 포로 홍호연(洪浩然)의 삶과 예술세계를 살펴봄으로써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포로의 애환을 담았다.
홍호연과 그 후손들의 삶을 조명하는 부분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전시된다. 홍호연은 1593년 2차 진주성전투 당시 산음(현재의 산청)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군대에 피랍되었다. 당시 10세 남짓한 그는 큰 붓을 들고 있었다고 전하는데, 시와 서예에 능하여 나베시마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글씨는 코부(こぶ) 즉, 혹부리 모양의 독특한 글씨체로, 그의 글씨를 새긴 병풍·현판 등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남긴 유품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손을 위한 마음이 담겨있다.
이번 전시에는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을 비롯한 일본의 6개처에서 출품한 중요 문화재와 국내의 관련 문화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전시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었던 조선인 포로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일본이 전쟁으로 이룩한 경제․문화의 변화와 발전 등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통하여 한·일우호와 교류증진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전시개요
◦ 전 시 명: 국제교류전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
◦ 전시기간: 2010. 11. 30.(화) ~ 2011. 02. 06.(일)
◦ 전시장소: 국립진주박물관 두암관
◦ 전시자료: 홍호연초상(일본 사가현중요문화재) 등 110여 점
전쟁, 이별, 그리고 400년 만의 해후 - 韓·日 남양홍씨 후예의 상봉 -
2010년 3월, 국립진주박물관과 일본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은 학술교류협정에 따른 공동학술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의 목적은 임진왜란 당시 납치되어 일본으로 연행된 홍호연洪浩然의 고향을 찾는 것이었다. 그 결과 경남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에 소재한 남양홍씨 마을과 『남양홍씨세보』에서 그 출신을 밝힐 수 있었다.
일본에 전하는 여러 자료들에 기초하여 홍호연이 산음(지금의 산청) 출신이며, 운해雲海라는 별칭을 사용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공동학술조사를 실시하였다. 남양홍씨 마을에 전하는 운해에 대한 구전과 『남양홍씨세보』에 기록된 내용 등을 통해 조선에서의 홍호연의 이름이 운해임을 확인하였다.
족보에 의하면 4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성해成海, 둘째 천해天海, 셋째 운해雲海, 넷째 진해進海이다. 또한 장남인 성해의 문집인 『오촌선생실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천해와 운해가 일본군에 납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천해는 그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으며, 현재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에는 첫째인 성해와 막내인 진해의 후손들이 약 50호 가량 거주하고 있다.
한편, 12세 무렵에 일본으로 연행된 홍호연은 서예가로 활약하였던 인물로서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였고, 그 후손들은 12대에 걸쳐 현재까지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이번에 개최하는 국제교류전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의 개막식에서 일본의 홍호연 직계 후손들과 산청군에 거주하는 성해·진해의 후손들의 만남을 주선한다. 400여 년 전에 이루지 못한 형제의 꿈을 그 후손들의 상봉으로나마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공동학술조사를 통해 일본에 거주하는 홍호연의 후손들은 그 뿌리를 찾게 되었다. 또한 산청군에 거주하는 성해·진해의 후손들도 일본으로 잡혀간 선조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그 후손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으나 이번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양가의 후손들은 실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진화수)의 한․일 국제교류전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은 오는 11월 30일(화)부터 2011년 2월 6일(일)까지 69일간 계속된다. 이에 앞서 11월 29일(월) 오후 3시에 개최하는 개막행사에서 일본의 홍호연(운해) 후손과 한국의 홍성해·진해 후손들의 400여년 만의 감격적인 상봉이 예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 관련 주요 문화재 소개-
- 히젠나고야성제후진적도[肥前名護屋城諸侯陣跡之圖]
조선 침략을 위해 히젠[肥前, 현재 일본의 사가현] 나고야성에 집결한 다이묘[大名]들의 배치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나고야성을 쌓고 전국의 다이묘들을 집결시켰다. 도요토미의 진영을 중심으로 각 다이묘의 진영이 점으로 표시된 이 그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요시이에·이시다 미쓰나리 등 유명한 다이묘들이 정치적 관계에 따라 배치되었음을 보여준다.
- 포로쇄환유고문[朝鮮国礼曹俘虜刷還諭告文]
이 문서는 조선인 포로의 쇄환에 대한 내용으로, 조선의 예조에서 발행하고 1617년에 제2차 조선통신사가 전달하였다. 1607년 조선통신사 방문 시에 귀국하였던 사람들의 처우와 특전 등에 대해 소개하며, 아직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제2차 조선통신사는 321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 이삼평 가문 문서[乍恐某先祖之由緒を以御訴訟申上口上覚〕
이삼평이 일본으로 오게 된 경위와 자기를 생산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서술하여 놓은 일종의 유래서로 아리타의 중요문화재[有田町重要文化財]로 지정되어 있다.
이삼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군대에 의해 연행되어 나베시마의 부장인 타쿠 야스노리[多久安順]에게 맡겨졌고, 금강金江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로 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기 생산을 위해 타쿠의 곁을 떠나 도공들을 데리고 아리타 미다레바시[亂橋]로 이주하고,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기의 태토가 되는 자석광磁石鑛을 발견하여 텐구다니[天狗谷]에 가마를 설치하였으며, 이후 세공기술을 자손들에게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기술을 배우러 오면서 점차 번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 다완[白磁碗]
일본의 국등록유형문화재[国登録有形文化財]인 이 다완은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인 포로의 역할과 일본 도자산업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된다.
당시 일본사회는 센리큐[千利休]가 완성시킨 다도茶道가 유행이었다. 다도가 일반사회에 보급될수록 고급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사회적 욕구를 일본인 도공들은 만족시킬 수 없었다.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조선인 도공들은 새로 유입된 중국의 선진 기법과 일본 특유의 감각적인 도안과 색채 등을 가미하여 일본의 도자산업을 빠르게 성장시켜 나갔다. 실제로 아리타에서 조선도공에 의해 생산한 도자기는 1651년부터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였고, 1653년에 이천이백 개 1664년에는 사만 오천 개를 수출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이처럼 일본사회에서 도자기는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지닌 것 이었고, 그러한 도자산업의 성장과 발전은 임진왜란 당시 전쟁포로로 끌고 간 조선도공들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수은집[睡隱集]
강항의 본관은 진주이며 호는 수은睡隱이다.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퇴계학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형조좌랑으로 재직하던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는 남원으로 내려가 군량 공급의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 해 9월 강항은 전남 영광 앞 바다에서 일본군에게 연행되어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된 후, 2년 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다. 1600년 5월, 본국으로 귀국한 그는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를 죄인으로 자처하여 사직하였다. 이후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며 「간양록看羊錄」 등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에도시대 260여 년 동안 일본의 유학자들이 조선유학을 숭상하게 된 밑바탕에는 그가 포로 생활에서 보여준 고결한 절의와 에도유학의 단서를 열어 준 공로가 깔려 있었다.
수은집은 강항姜沆(1567~1618)의 시문집이며 4권으로 된 목판본이다. 원집 외에 별책인 『간양록看羊錄』, 부록, 별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1658년(효종 9)에 그의 문인들이 간행하였다. 특히 「간양록」은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을 당시 일본의 역사와 지리, 정치상황과 이에 대한 대책 등을 기록한 문집으로, 당시의 여러 일본 견문록 중에서 비교적 상세하고 체계적인 내용의 저술서로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많이 인용하였다.
- 이매계 부모장[李梅渓筆「父母狀」]
조선인 포로 이진영과 그의 아들 매계는 유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특히 매계가 지은 「부모장」은 도덕규범을 성문화한 것으로, 와카야마 지역에 유교적 관념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66세의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남룡공언행록南龍公言行錄』『동희공년보東熙公年譜』 『대군언행록大君言行錄』 『덕천창업기고이德川創業紀考異』 등을 남겼다. 아버지 등 가족과 함께 와카야마의 카이젠지[海善寺]에 묻혔으며, 이 묘소는 와카야마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여대남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余壽禧宛日遥書状案]
1620년 10월 3일, 구마모토의 혼묘지[本妙寺]의 3대 주지인 여대남(일요상인)이 아버지인 여수희에게 보낸 편지이다. 특히 추신에 ‘산음홍운해山陰洪雲海’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호연이 산음(현재 산청지역) 출신임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결국 이 편지는 아버지에게 부치지 못한 채 구마모토의 혼묘지에 남아 전한다.(KBS 역사스페셜 ‘어느 임란포로의 비밀편지-2003년 2월 15일 방영’ 에 소개)
- 홍호연초상[洪浩然畵像]
일본 사가현중요문화재인 이 초상은 가노파[狩野派, 에도시대의 화파]의 사가번[佐賀藩] 화가인 가키하라[枾原典徵]가 시와[志波] 가문에서 소장한 「홍호연초상」을 모사한 것이다. 1860년 홍가의 9대 당주인 홍안습이 개장改裝하였다. 특히 초상은 어릴 적 포로로 잡히던 당시 홍호연의 모습과 이미 늙어버린 만년의 홍호연이 오버랩되어 표현된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 인[忍]
홍호연이 유지를 담아 쓴 글로 사가현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군이 사망하면 가신들이 함께 순사(殉死: 따라 죽음)하는 관습이 있었다. 1657년 홍호연은 주군인 나베시마 가츠시게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통보받고 순사 직전에 이 글을 남겼다. 『홍호연전』에 의하면 그는 노년에 휴가를 청하여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가츠시게의 소환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인忍’은 포로였기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의 애환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 동시에 자손들에게 남긴 덕목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 관련 주요 인물 소개-
- 노인魯認(1566~1622)
1592년 임진왜란 때 노인은 권율을 따라 이치梨峙·행주·의령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정유재란 때에 남원성이 함락되자 적의 동정을 살피다가 적탄에 맞아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에 3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중국에서 온 차관差官의 배편으로 동료 기효순奇孝淳과 함께 명나라로 탈출하였다. 그 후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강론하다가 신종神宗으로부터 말 1필을 하사받고 1599년 귀국하였다.
노인이 기록한 금계일기(錦溪日記, 보물 제311호)에는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가 포로생활을 할 때부터 중국으로 탈출할 때까지의 생활상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일본에 소개한 조선의 문물과 제도, 일본의 풍속 및 습관, 탈출 경위와 중국의 생활․문화 등이 자세히 수록되었다.
- 이삼평李參平(?~1656, 일본명: 가나가에 산베이[金ヶ江三兵衛])
임진왜란 때 수많은 조선인 도공들이 아리타에 정착하여 살았지만, 과 같이 그 이름이 남겨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일본의 조선인 도공 납치계획에 따라 잡혀가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1594년 경 나베시마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가 가라츠[唐津]근방에서 다쿠고가라츠[多久古唐津] 도자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 뒤, 아리타에서 백자광白磁鑛을 발견하여 1605년경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한다.
1616년, 이삼평은 도공 열여덟 명과 함께 아리타로 이사한 후, 성씨를 가나가에라는 일본식으로 바꾸고 아리타를 일본도자기의 산실로 만들었다. 당시 일본에는 제대로 제작된 자기가 없었으므로 이를 보고 각처에서 도자기 굽는 법을 배우려고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아리타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하여 번성하였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일본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를 받았다. 현재 아리타에는 이삼평을 신으로 모시는 도잔진자陶山神社와 1917년에 세워진 도조陶祖 이삼평의 묘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 강항(姜沆; 1567~1618)과 후지와라 세이카과[藤原惺窩; 1561~1619]]
1597년 전남 영광 앞바다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던 강항은 포로로 억류된 상황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중봉소賊中封疏」를 작성하기도 하고, 후시미에 억류된 동안 후지와라와 교유하면서 일본의 주자학을 진일보 시켰다. 강항은 후지와라와의 만남을 통해 주자학을 전수시켰고, 예법에 관해서도 많은 지식을 전주하였다. 특히 후지와라는 강항의 도움을 얻어 사서오경에 대한 일본 최초의 주자주석본인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을 완성하였다. 이 책의 완성은 일본유학사에서 한당학을 주자학으로 전환시킨 업적으로 평가된다.
1600년 강항은 귀국하자마자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를 올리는 등 일본의 정세와 사회상을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일본 억류 중 아까마쯔 히로미치 등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2년 8개월 동안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1600년 5월에 귀국하였다. 강항이 귀국한 이후, 후지와라에게는 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어 일본사회에 유학사상을 뿌리박히게 한 씨앗이 되었다.
- 이진영李眞榮(1571~1633)과 아들 이매계李梅渓(1617~1682)
1593년 경상도 영산靈山 출신인 이진영李眞榮(1571~1633)은 영산에서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오사카를 거쳐 기슈[紀州]지역으로 팔려갔고, 혼인하여 아들인 매계를 낳았다. 그는 1626년 와카야마[和歌山] 번주인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에 불려가 강학을 하거나 유학자로서 활약을 하였다. 그의 아들 이매계(1617~1682)는 어릴 때부터 유학을 전수받아 17세에 번유藩儒(영주를 섬기는 유학자)가 되었다. 그는 와카야마의 도덕규범이라 할 수 있는 「부모장父母狀」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 여대남(余大男, 1581~1659)
경상남도 하동 출신의 여대남은 쌍계사 보현암普賢庵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사로잡혔다. 당시 여대남은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하여 시문을 짓자 가토 기요마사가 그를 범상치 않게 보고 일본으로 연행하였다. 일본에 피랍된 여대남은 혼묘지의 2대 주지인 일진대사의 도움으로 교토[京都]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수학을 한 후, 규엔지[久遠寺], 호린지[法輪寺] 등에서도 수학하였다. 그 후 그는 일진대사의 뒤를 이어 1612년에 혼묘지의 주지가 되었고 일요상인日遙上人이라 불렸다.(KBS 역사스페셜 ‘어느 임란포로의 비밀편지-2003년 2월 15일 방영’ 의 주인공)
- 홍호연洪浩然(1582?~1657)
홍호연은 운해雲海라고도 하며 법명은 운해호연거사雲海浩然居士이다. 그는 1593년 진주성 인근 산음[山陰: 현재 산청]에서 진주성을 공격하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게 연행되었다. 당시 10세 남짓의 그는 일본군을 피해 바위 틈에 붓을 들고 숨어 있다 잡혔다고 전한다.
일본으로 연행 된 홍호연은 나오시게의 측근으로 있었는데 한시와 서예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나오시게가 사망한 후 사가 초대 번주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의 측근으로도 일했다. 『홍호연전』에 따르면 이 시기의 몇 년 동안 교토고산[京都五山]에서 유학을 하도록 허락 받았으며 녹봉 100석에 학문료 5인분 녹미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히고노쿠니[肥後国] 구마모토 혼묘지[熊本本妙寺]의 승려 일요日遥와는 같은 조선인 포로라는 처지로 번을 초월한 친교가 있었다고 한다.
홍호연의 글씨는 코부(こぶ) 즉, 혹부리 모양의 독특한 글씨체로, 그의 글씨를 새긴 병풍·현판 등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교토시[京都市]의 쵸호지[頂法寺] 현판, 사가시[佐賀市]의 요도히메신사[与止日女神社]와 미야키마치(みやき町)의 지리쿠하치만구[千栗八幡宮]의 입구 기둥 등에 그의 글씨가 지금까지 남아 전하고 있어 서예가로서의 그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남긴 유품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손을 위한 마음이 담겨있다.
※ 2008년 홍호연의 후손인 코 요시로[洪悅郞]씨는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오던 자료를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기증유물은 홍호연과 그 후손들의 유품으로 약 88건에 이른다. 이 자료들이 공개됨으로써 홍호연이란 한 인물을 통해 포로로서의 삶과 애환을 이해하고, 나아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의 실상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특히 2010년 국립진주박물관과 일본의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佐賀県立名護屋城博物館]의 공동학술조사의 결과, 임진왜란 당시 헤어진 홍호연과 그 형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일본에 거주하는 홍호연(운해) 후손들의 뿌리를 찾음과 동시에 한국에 거주하는 성해·진해의 후손들이 400여년 전에 헤어진 선조의 후손이 있음을 밝히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생사도 모르던 형제들의 이루지 못한 꿈을 후손들이 뒤늦게나마 이룰 수 있게 되어 더욱 뜻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