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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비 개인전 - 은유와 상징 속에 노닐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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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박승비 개인전 - 은유와 상징 속에 노닐다 2
전시장소 : 갤러리 이즈 1층 제1전시장
전시기간 : 2012년 12월 12일부터 12월 18일까지

 

 

박승비의 ‘은유와 상징 속에 노닐다(II)’에 보이는 ‘원시반종(原始返終)’ 미학

 

조민환(한국서예학회 회장, 춘천교대 교수)

 

               

1. 

박승비의 이전 작품이 봉황이 모란꽃 위에서 배회하는 날개짓과 ‘꽃문으로 들어가는 즈음’에 착안하였다면, 이번 작품은 봉황이 모란꽃의 품속에 안착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모란꽃과 봉황의 하나됨’이란 형상에 주목한다. 아울러 모란꽃에 감싸인 사신도(四神圖) 영물(靈物)들의 형상을 통해 또 다른 차원에서 천상 세계와의 합일을 꾀한다. 봉황과 모란이 하나가 되는 정경, 사신도의 영물들을 모란꽃이 감싸는 형상을 통해 자신의 시원(始原)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는 ‘원시반종(原始返終)’의 미학을 꿈꾼다.

작가는 세상에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사이에서 절대자유를 꿈꾸며 신(神)들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작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신이 깃들어 있음을 확인시키고 또 그것을 일깨우고자 하는데, 그 상징적 형상으로써 봉황과 사신도의 영물들에 주목한다.

     

 

2.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가장 추앙받는 시인이면서 은사(隱士) 삶의 전형을 보여준 도연명(陶淵明)은 [음주(飮酒)](五)에서 산의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들 무렵 아침에 둥지를 나간 새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 자연의 참 진리가 그것에 담겨 있음을 말한 적이 있다.1) 자연의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나가면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노자] 16장에서는 되돌아옴 속에 자연의 항상성이 있음을 말한다.

새들은 하늘을 나는 것에 그 존재 이유가 있다. 하지만 새들이 하늘에서 온종일 날기만 할 수 있을까? 새들이 하늘에서 화려한 날개를 펼치며 우아하게 날 수 있음은 나뭇가지나 풀숲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깃털을 창공에 펼치고 나는 봉황이라도 언젠가는 휴식이 필요하다. 이 봉황은 아무 곳에나 앉지 않는다. 이런 봉황의 휴식처를 실제로 확인한 사람은 없다. 사신도의 영물들도 마찬가지다. 다 상상 속의 이야기이며 신화다. 하지만 그 신화는 인간에게 많은 꿈을 꾸게 한다.

작가는 그림을 전개하고 푸는 방식에서 일부러 화려한 장식적 문양을 선택한다. 그것은 작가가 의도하는 은유와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작가는 이런 점에서 이번 작품의 창작에 임할 때 [금강경]의 “무릇, 모양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라는 말과  [화엄경]의 “무릇, 모양있는 것은 모두가 다 진실이다.(凡所有相, 皆是眞實)”라는 말을 화두로 삼았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도 있다. 허망과 진실로 각각 다르게 썼지만 결국 같은 의미이며, 작가는 마음에 ‘범소유상 개시허망’을 품으면서 형상을 더욱 현란하게 장식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아울러 작가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유에서 출발하여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었다. 허망은 역설적으로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의 봉황 설정이나 사신도의 영물 선택은 이런 역설적 사유방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항상 봉황을 간직하며 산다. 하지만 그 봉황을 항상 떠나보내기만 하였지 품고 사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봉황을 품을 수 없을까? 봉황과 모란의 만남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면서 아울러 작가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것은 봉황을 맞이하는 모란이 작가 자신의 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봉황은 하늘로 비상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이면서 아울러 그 봉황은 항상 자신의 근원에 되돌아가야할 존재이기도 하다. 구만리 장천(長天)에서의 화려한 비상을 마친 천상의 새인 봉황은 이제 땅으로 내려와 쉬고자 한다. 봉황이 모란꽃에 안착함에는 자신이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는 복귀의 미학이 서려있다. 아울러 봉황은 그곳에서 또 다른 생명체를 잉태하고자 한다. 봉황과 모란의 ‘불이(不二)’적 관계 속에서 봉황의 쉼은 소요(逍遙)의 끝이면서 아울러 출발이기도 하다.

 

3.

 ‘원시반종’의 복귀 미학에는 그동안 잠시 잊혀졌던 신화의 세계가 나와 하나가 되는 광대한 화해(和諧)정신이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도 눈을 돌린다. 작가가 갑골문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림문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갑골문은 인간과 신의 교접의 상징으로 신의 언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시도하는 문자 형상을 통한 사신도(四神圖)에 보이는 다양한 상징적 기호들은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 문자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한 ‘교직(交織)’적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영물(靈物)들을 통해 사신도는 단순 형상적 차원을 넘어선다. 작가는 모란에 감싸여 있는 사신도의 영물을 통해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의 만남을 도모한다. 사신도에는 형상 너머 작가의 고향의식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봉황을 맞이하는 마음의 문을 열고 사신도의 영물을 품에 안고자 해도 그것들의 신령성이 가슴속에 깃드는 것은 별개 문제다. 신령성의 깃듦 여부는 각각 개인의 심적 상태에 달려 있다. ‘덕문유광(德門有光)’이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작가는 반성적 고찰을 통해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덕성을 온전하게 기르면서 봉황과 영물들을 맞이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모란이나 봉황, 사신도의 영물들은 작가 자신과의 합일 및 교통을 위한 은유와 상징성을 담은 기호로도 작동하고 있다.

항상 ‘주일무적(主一無適)’의 경(敬)의 마음으로 한 점 한 획 흐트러짐이 없이 창작에 임하는 작가는 모란꽃이 봉황과 사신도의 영물을 품는 것을 통해 인간과 신의 상호 교직(交織)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을 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작품의 화려한 색과 장식적 요소에는 경의 마음에 바탕한 신과의 합일을 도모하는 경건함이 함께 서려있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0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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