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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광주박물관]몰래 쓴 무덤을 파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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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쓴 무덤을 파 가시오!

국립광주박물관, 조선시대 무덤송사[山訟] 과정을 이야기가 있는

 전시로 꾸며

 

 

전시제목: 테마전시 무덤송사 - 몰래 쓴 무덤을 파 가시오! -

전시기간: 2011년 5월 17일(화) ~ 9월 18일(일)

전시장소: 국립광주박물관 2층 유교문화실

 

효孝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포함한 숭조崇祖사상은 좋은 묏자리에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고 잘 보전하는 것으로 현재도 조상의 산소를 찾아 시제時祭를 지내는 우리 국민 정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 지금부터 140년 전 전라도 광주에서 멀리 경기도 고양까지 수차례 올라가 소송을 통해 조상의 산소를 지키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이원복)은 2003년과 2004년 2회에 걸쳐 전의이씨 종중으로부터 기증받은 유물을 이야기가 있는 전시를 통해 일부 소개한다. 이번에 소개되는 유물은 <무덤송사山訟: 몰래 쓴 무덤을 파 가시오!>라는 주제로 유교문화실에서 5월 17일부터 9월 18일까지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개인의 분쟁 판결을 관청에 호소하는 일을 송사訟事라고 하였다. 무덤송사[山訟]는 토지송土地訟, 노비송奴婢訟과 함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3대 소송 중 하나로, 16 ․ 17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18 ․ 19세기에 이르면 사회 전반으로 퍼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묏자리 선정[擇山]과 관련된 무덤송사는 유일하게 상중喪中에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유교식 상장례喪葬禮에서 조상의 묏자리를 좋은 곳에 쓰면 후손이 복福을 받는다는 풍수설이 효孝관념과 결합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이렇듯 무덤송사는 효를 내세운 구복求福 성격의 소송으로 전개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토지 확보, 토지 소유권의 획득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번 전시의 출품 유물로는 <조상의 묏자리에 이방인이 몰래 무덤을 쓴 것을 발견하고 고발한 청원서[上書]>, <무덤의 위치를 그림으로 표현한 배치도[山圖]>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또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위조문서로 작성된 위임장[牌旨]과 매매문서[手標]는 조선시대 소송제도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특히 소송이 몇 해에 걸쳐 계속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까지 올렸던 청원서 등이 전시돼 더욱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의 무덤송사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의 9대조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가 묻힌 경기도 고양 도내동 선산에 평민 김효길이 몰래 아버지와 아들 무덤을 쓴[偸葬] 사건으로 4년간의 치열한 소송과정을 보여준다.

무덤산송에서 전의이씨 9대조로 등장하는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1551~1627)는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1617년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려는데 반대하여 1618년 변방인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이신의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던 중 사망하였다. 석탄은 당대 충의와 절의로 이름 높은 선비였으며, 사후에는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하사받았고 고양 문봉서원과 괴산 화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관람객이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되는 유교문화를 다양한 이야기로 꾸며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전시에 힘쓸 계획이다. 그리고 박물관에서는 한 개의 질문을 통해 열개의 답변을 얻어갈 수 있도록 상시 근무하는 해설사에게 설명을 요청하면 더욱 재미있는 박물관 관람이 될 것이다.

 

[해설자료]

전의이씨와 김효길간의 구체적인 무덤송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의이씨는 경기도 고양에 선산이 만들어진 후 240여 년 동안 매년 시제時祭를 지냈으며, 1869년 봄에 김효길이 몰래 쓴 무덤을 발견하고 파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평민이지만 상당한 재력을 갖추고 경기도 고양지역의 토호土豪로 행세한 김효길이 무덤을 옮기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자, 전의이씨는 1870년 고양군수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김효길과의 소송을 시작한다. 김효길은 토지매매를 대신하게 한 위임장과 매매증서를 위조하여 관에 제출하기도 하고, 3번 옥에 갇히고 2번 관에 붙잡혀 오면서도 무덤을 파가지 않는 등 횡포를 부린다. 결국 이 송사는 1870년(고종 7)부터 1873년까지 4년 동안 이어졌고 고양군수와 경기관찰사를 거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까지 진정서를 올리게 된다.

 

경기도 고양을 중심으로 무덤송사가 진행된 것은 1600년에 이신의의 처 경주이씨가 사망하여 고양 도내동에 묻히고, 1621년 장남 이정길과 1627년 이신의를 같은 선산에 장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이정길의 처 광산이씨는 남편이 사망하고 시아버지가 유배 중이던 1623년 1월 세 아들을 데리고 남평의 친정 쪽으로 이사하였다. 그 후손들은 경기도로 이사하지 않고 광주, 남평, 화순 등지를 중심으로 살며 호남 사족士族으로 정착하였으며, 고양 도내동의 원지분산遠地墳山을 수호하게 되었다.

 

이민식 등이 흥선대원군에게 제출한 청원서

이희삼이 경기도 관찰사에게 올린 청원서

고양군에서 경기관찰사에게 올린 첩보

 첩보: 상급기간에 청원서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고한 문서

 

위임장

상전이 노奴 후손厚孫에게 1867년 정월에 거래를 대신하게 한 위임장이나 소송을 통해 위조된 것으로 밝혀진 문서

 

증명서

이생원 댁 노奴 후손厚孫이 1867년 정월에 주인을 대신하여준 매매증서

무덤 배치도

편집 스마트K (koreanart21@naver.com)
업데이트 2024.11.0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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