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났다, 살아 남은 가족이 더없이 소중했다
작자미상, 화첩 『선묘조 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중 「경수연도(慶壽宴圖)」, 지본채색, 32.7×24.0㎝, 홍익대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그림을 볼 때 불만의 하나는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적다는 것입니다. 물론 꼼꼼하게 전문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인들이 자연의 조화를 그림 속에서 확인하고자 한 산수화나 또 자신이 은거해 살고 싶은 이상향을 그려놓은 산수화는 보기에 밋밋하고 심심한 게 사실입니다. 자극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눈에는 좀처럼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임진왜란 이후 무명의 화원 화가가 그린 이 「경수연도(慶壽宴圖)」는 볼거리가 쏠쏠한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댁에서 열리고 있는 큰 잔치를 그린 그림입니다. 높은 장대에 백목 차일을 쳐놓고 한창 연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주빈들이 청홍의 치마 저고리를 입고 각상을 받아놓고 줄지어 앉아있습니다. 대청에 이어 임시로 마련한 마루인 보계(補階) 중앙에는 여인 둘이 술이라도 올리려는 듯 무언가를 높이 쳐들어 가져가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사모관대의 인물 하나가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습니다.
자리를 깐 마당에도 기녀인 듯한 인물 둘이 거문고를 뜯고 있으며 역시 오사모 차림의 인물 둘이 팔을 벌리고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 백자 항아리가 올려져 있는 탁자 곁에는 시중드는 여인들 몇몇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중입니다. 장막 입구에는 구경에 열중하는 머리를 길게 딴 소녀의 뒷모습도 보입니다. 또 건너편 장막 뒤에는 정장 차림의 악공들이 연주를 하는 모습도 별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는 장소의 묘사가 과거와 다릅니다. 야외에서 열린 계회도는 별개로 치더라도 실내 행사로 그려진 궁중행사도나 기로회도와 사뭇 다릅니다. 과거의 행사 기록도는 실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 위쪽에 경직된 모습의 지붕이 그려지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붕이 거의 생략돼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 살짝 보이는 정도입니다. 일본 중세에 그려진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에서 지붕을 걷어내고 실내를 들여다보듯 그린 후키누키야타이(吹拔屋台) 기법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주변 경관 역시 이전과 달리 모두 차단된 상태입니다. 햇볕을 가리는 차일 이외에 사방에 휘장이 쳐 있습니다. 몇 그루 나무가 보이는 마당조차 흰 장막으로 가려서 외부 시선을 차단했습니다. 물론 이로 인해 그림의 주된 공간이 더욱 아늑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는 연회의 성격에 맞춰 화원이 고안해 내 특별한 공간 구도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목해 봐야할 것은 열 지어 앉아있는 주빈들이 머리 위에 족두리를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연회 참석자는 절하고 춤추는 사람 두 셋을 제외하면 모두 여자들입니다. 남자로 보이는 악공도 장막 밖에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1605년 남산 밑 회현동에 있던 호조판서 한준겸의 자택에서 열린 경로 잔치를 그린 것입니다. 경로 잔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원들이 모여서 연 연회이기도 합니다. 이 무렵 그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비슷한 처지의 조정관료 13명과 수친계(壽親契)를 결성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수친계를 만든 것은 그보다 2년 전에 참의 이거가 노모를 모시고 경로연을 연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선조는 이거가 99세가 된 노모 채부인을 모시고 산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음식을 하사하고 이거의 관직도 높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경로 잔치를 열게 되었는데 이를 한준겸 등이 본받아 수친계를 조직한 것입니다.
한준겸의 저택에서 열린 경로연에는 계원들의 노모 외에 100세를 넘긴 이거의 노모 채부인이 다시 초청되었습니다. 그림 한가운데 혼자 앉아있는 노인이 그 분입니다. 선조는 한준겸의 집에서 경수연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이때에도 음식을 하사하고 아울러 궁중의 악사를 보내 흥을 도왔습니다. 장막밖에 근사하게 차려입고 악기를 다루는 악공들은 바로 궁중의 장악원 소속인 것입니다.
작자미상, 화첩 『선묘조 제재경수연도』 중 세 번째 그림으로 선부(膳夫)들의 음식 준비장면, 지본채색, 32.7×24.0㎝, 홍익대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여러 면에서 이후에 등장할 풍속화 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기록화가 궁중이나 사대부 중심의 행사를 대상으로 했다면 그 범위가 민간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과거의 행사 기록화에 보이는 틀에 박힌 표현에서 벗어나 구성과 인물 배치 등에서 자유로운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 역시 다가올 풍속화의 시대를 예고해주는 전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경수연도(慶壽宴圖)
경수연도는 임진왜란이 끝난 17세기에 들어 비로소 처음 등장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전쟁에 휩싸이면서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전란 이후 재건과정에서 효를 강조하고 경로 사상을 고취하는 등 가족제도를 재정립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민간에서 열리는 경로 잔치를 국가적으로 권장한 것도 이 때의 일입니다.
이 그림은 『선묘조 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화첩의 한 폭입니다. 의령 남씨 가문에 전해온 이 화첩에는 메인이 되는 이 장면 외에 네 장면이 더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회가 열린 건물의 입구를 그린 것으로 여기에는 따라온 사람들이 둘러앉아 기다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음식을 마련하는 찬간을 다룬 것으로 솥이 걸리고 장독 등이 등장합니다. 기록에는 당시 왕실에서 파견된 요리사들이 요리를 담당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남자들이 불을 때고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수친계의 계원들과 이들의 자제들이 별도로 모여 연회상을 받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화첩은 참가자 후손들 집에 각각 전해오면서 여러 번 모사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 이 중 가장 이른 홍익대박물관 소장본 이외에 4점이 더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