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의 『산수화첩』중 ‘의송관안도(倚松觀雁圖)’, 지본수묵, 19.1×23.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글씨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림 역시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조선 중기에 요절한 천재화가 이정(李楨ㆍ1578∼1607)은 당시로서는 특이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이 들어있는 산수화첩이 대표적인데 여기에는 12점의 산수화가 들어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애석하게도 이외에 이렇다 할 게 없습니다. 그저 한두 점이 전할까 말까 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인상이 산수화가로 고정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당시 그가 조숙한 화명(畵名)을 떨친 분야는 불화였습니다. 그의 조부는 노비에서 화원이 된 이상좌입니다. 이상좌도 불화를 잘 그렸는데 이는 아마도 내림인 듯합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그를 배었을 때 꿈속에 금빛 몸을 한 나한(羅漢)이 나타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 집안 삼대가 모두 부처님을 잘 그려 여태까지 그린 것이 수천점이 되니 내가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너의 자식이 되어 보답하려 왔다.”
그래서 태어난 게 이정인데 그는 5살 때 스님 모습을 그렸고 8살 때는 불화를 그릴 정도로 이 방면에 탁월한 솜씨를 보였습니다. 이 불화들은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불화 외에 이름난 분야가 산수화입니다. 1606년에 사신으로 와서 조선의 여러 화가에 대해 타박을 놓던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ㆍ?∼1624)도 그의 솜씨만큼은 탄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경에 돌아갈 때 이정에게 산수화를 많이 그려달라고 해 가져갔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실력이 출중했던 이정은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애받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조숙한 천재로 인정을 받으면서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에게 글을 배웠으며 또 홍길동전의 허균과도 깊이 사귀었습니다. 또 당시 명문출신의 서얼 자손으로 사회적 차별에 불만을 품고 소양강 일대에서 호기롭게 작당해 지내던 이른바 강변칠우(江邊七友)와도 흉허물 없이 지냈습니다. 이정은 이들 가운데 특히 심우영ㆍ이경준과 친했는데 이후에 소위 이들 강변칠우는 세월을 불평한 끝에 조령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뒤 역모를 모의하다 체포돼 모두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에 의리도 강했으며 아울러 매우 감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경치를 만나며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으며 또 지나가다 좋은 산수를 보면 읊조리고 바라보느라 돌아갈 줄 몰랐다고 합니다. 또 남에게 주기도 좋아해서 하지만 추위에 떠는 사람을 만나면 옷을 벗어 주어버려 어리석다는 비웃음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합니다. 그림은 깊어가는 겨울, 남쪽으로 길을 떠나는 기러기와 그를 바라보는 고사를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초기나 중기에 보던 산수화의 필치와 매우 다릅니다. 조심스레 필치로 구도와 형태를 그린 것과는 다릅니다. 첫인상이 담백한 가운데 거칠면서도 강한 느낌입니다. 먼 산은 형체의 구분이 없습니다. 옅은 먹으로 단번에 그렸습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 역시 짧은 붓 두 번으로 끝냈습니다.
반면 고사나 소나무 그리고 주변 바위는 짙은 먹을 적절히 구사하며 스산한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나무 줄기와 바위는 옅은 먹으로 형체를 잡은 뒤에 짙은 먹 선으로 윤곽에 포인트를 주었습니다. 앞쪽 바위의 굵은 선은 화법을 의식하지 않고 짓뭉갠 것처럼도 보입니다.
하지만 고사의 두건과 석장은 허술한 가운데에서도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소나무 가지에 걸쳐진 덩굴 역시 무심히 그린 듯 하면서도 정교합니다. 빠르고 거친 가운데 정확하고 세밀 한 표현이 공존하는 세계는 천재적 기량 외에 달리 설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그림은 이처럼 이전의 화풍과 결별해 있습니다. 조선전기에 유행한 안견 화풍도 보이지 않으며 그 이후의 절파화풍과도 무관해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조금씩 전해지고 있던 명나라 중기 이후의 남종화와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합니다. 조숙한 천재가 만일 30살에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모습을 보였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덧붙이자면 그림 속에 기러기가 등장하는 일화라면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나라의 사신으로 가 흉노에게 붙잡힌 소무(蘇武)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어느 날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적어 기러기발에 묶어 한나라 궁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에 기러기가 등장하는 데 기러기발에 편지를 묶을 때 소무는 바이칼호수 근처에서 양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림 속 소나무에 기댄 고사는 과연 소무일까요.
이정(李楨ㆍ1578∼1607)
조선 중기의 화가로 자는 공간(公幹)이며 호는 나옹(懶翁)이며 그외 나재(懶齋), 나와(懶窩), 설악(雪嶽)도 썼습니다. 그는 이름난 화원 집안출신으로 조부는 노비에서 화원이 된 이상좌이며 부친은 숭효입니다. 숭효가 젊은 나이로 죽은 뒤 같은 도화서 화원이었던 숙부 흥효의 손에 컸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천재로 이름이 나 12살 때인 1589년 금강산 장안사를 개축할 때 산수화와 천왕상을 그려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렇지만 천성이 게을러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정보다 9살 많은 허균(許筠ㆍ1569∼1618)과는 각별했던 관계로 허균은 그가 죽자 장문의 애사(哀詞)를 지었습니다. 30살까지 밖에 살지 않아 기록이 적어 화원의 이력조차 불분명합니다. 다만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이순신, 권율 등을 그린 공신들의 초상을 그렸다는 사실이 전합니다.
허균의 글을 보면 재상집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면서 뇌물을 받는 장면을 그려놓고는 평양으로 달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생들과 어울려 놀다 과음해 죽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산수화첩』 속 이정의 또 다른 그림.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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