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전의 일이지만 동네 아이 머리통을 툭툭 치는 일은 어디서나 아주 흔했다. 오랜만에 본다고 한 대 갈기고 그냥 귀여워서 뒤통수를 한 대 갈긴다는 식이었다. 그 시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제는 엄연히 폭력이 됐다. 재벌의 미술품 구입을 보는 시선에는 어쩌면 이런 구식 행태가 여전히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세한 내막보다 ‘또, 너냐?’하는 식으로 뒤통수부터 갈기고 본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일부 언론에는 서울의 유명 갤러리가 한 재벌 오너와 굉장한 거래를 했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몇 년에 걸친 거래지만 1천 몇백억 원에 이르는 거금을 외국 유명작가 작품을 사는 데 썼다는 것이다. 돈의 액수도 그렇지만 새로 이름이 알려진 재벌 오너 등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오너 이름, 금액, 작품 제목이 조금씩 다를 뿐 이런 류의 뉴스는 이전에도 많았다. 특검을 할 때도 그랬고 저축은행으로 시끄러웠을 때도 그랬다. 그때도 예외 없이 예의 화랑이 중간에 서서 고가의 외국작품을 중계했다. 이러고 보면 이번 일도 ‘이쪽도네’정도이다.
재벌의 고가외국작품 구입과 사회적 감시의무 사이의 선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법을 어겼으면 법대로 하면 되고, 세금을 덜 냈으면 내면 고만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주 되풀이되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이 있다.
최상층부 컬렉터와 일급 화랑 그리고 이들이 다루는 외국유명작가의 고가 작품들이 이루는 이른바 삼각 연합의 문제다. 이들 연합은 심하게 말하면 그동안 국내 미술시장을 왜곡시키고 황폐화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국내에 외국미술품 수입자유화는 지난 91년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고가의 외국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아마 지난 10년 정도일 것이다.
재력을 갖춘 대형 컬렉터들이 외국 작품을 선호하자 실력 있는 화랑들이 모두 이쪽으로 뛰어들었다. 주력 업무를 외국유명작가 작품을 소개하는데 둔 것이다. 이래서 삼각 연합이 제대로 형성됐는데 문제는 그 파급 효과였다. 차세대 실력 있는 화랑을 꿈꾸는 후발주자들도 이를 보고 배우면서 이 구조에 가담한 것이다. 그 결과 국내 시장에서는 한마디로 ‘국내’가 없어지게 됐다. 그리고 탑클래스 화랑부터 줄줄이 외국을 기웃거리자 국내 작가들은 저절로 찬밥 신세로 변했다. 외국작가 중계란 원래 그쪽에서 검증 완료된 작가를 소개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 이들은 국내 작가를 봐도 누군가 먼저 나서서 검증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게 버릇이 됐다.
어느 나라든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외국 작품에 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록펠러, 모건, 반즈 같은 거부들은 유럽미술 컬렉션에 열중했다. 일본도 1910년대 경제호황기 때 중국도자기에 열광했고 7-80년대에는 인상파 구입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때 미국은 세계 미술의 변방이었다. 일본 근대미술은 인상파에서 시작된 바 있으므로 인상파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주변에 지금처럼 쿠사마 야요이나 스기모토 히로시, 무라카미 다카시 등도 없었을 때였다.
한국의 찰스 사치를 기다리며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사정이 다르다. 인프라로 보면 중진국을 넘어서도 훨씬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한번 개최에 수십억 원을 쏟아붓는 최전위(最前衛)현대미술의 광주비엔날레는 이미 9번이나 개최됐다. 국제 규모의 아트페어가 전국에 6, 7개 열리고 있다. 또 서울에만 화랑이 400여 개를 헤아린다. 전국 곳곳에는 멀리 유럽 작가들도 부러워하는 충실한 설비와 지원의 작가 레지던스가 가득하다.
이런 상황이지만 작가가 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홍콩미술시장에 가보아도 중국, 일본작가에 인도, 인도네시아 작가까지 최고가 갱신기록 대열에 서 있지만 거기에 한국 젊은 작가들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위만 바라보고 외국만 쳐다봐온 삼각 연합이 가져온 폐해이자 악순환이다. 미술시장도 엄연히 산업이다. 발전하는 산업이 되려면 발판이 튼튼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컬렉터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김장해준다는 정신없는 화랑도 문제지만 컬렉터도 조금은 생각을 달리할 때가 됐다. 1천 몇백억 원의 몇십분의 일도 안 되는 돈으로 yBa를 세계적으로 끌어올린 사치 컬렉션(Saatchi Collection)과 자기는 무관하다고 한다면 지나가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아도 그다지 할 말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