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규 代表/ koreanart21.com
윤철규 한국미술산책(10)
날이 차가워지면서 따뜻한 곳이 그리워지게 됐다. 밤도 부쩍 길어졌는데 이런 검은 밤에는 친구끼리 무릎을 맞대고 오순도순 얘길 나누는 것도 제격이다. 급박한 얘기보다는 한 발짝쯤 물러서 세상사에 대한 공리공담도 긴 밤에 어울리는 화제일 것이다. 절박하지 않은 문제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요즘은 어울리지 않게 됐지만 예전에는 숱하게 많았던 것같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연애이야기라는 『겐지모노가타리』 에는 하릴없는 귀족 청년들이 모여 비오는 밤을 배경으로 여자들을 비교하는 얘기가 나온다. 자칫하면 품격상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는 화제인데 일본 중세는 아직 체면이 있었는지 내용은 주로 여인들의 기품에 관한 것이었다. 어쨌든 미국 출신의 세계적 일본연구자인 도날드 킨 역시 19살때 이 연애소설에 빠져 일본 문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한다.
품평이라고는 하지만 여자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군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대인의 화제로 적당치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자에게서 한 발 나아가 세상 사람들 일반에 대해 품평을 하자면 그럴듯한 청담(淸談)이 된다. 중국에서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 말기에 정치가 어수선해지자 해가 뜨면 아예 대밭으로 출근해 마음 맞는 친구들과 종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대인들이 있었는데 이를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한다. 매일 머리를 맞대고 지내자 화제가 고갈됐는지(?) 테마를 정해 얘기를 이어가기로 했는데 그게 인물에 대한 품평이었다. 문화사에 평(評)이라는 중요한 장르가 탄생하는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는데 당시 이들의 품평 기준은 ‘청하냐 탁하냐’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탁한 사람을 만나면 이들 중 지독한 어느 한 사람은 눈의 흰자위만 보이며 상대에 응했다고 한다.
이후 품평은 사람에서 사물로 확대되면서 식자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듯하다. 그래서 여러 장르에서 품평이 나오게 됐는데 그중 먼저 나온게 시에 대한 것이고 뒤이어 글씨가 뒤따랐다. 이를 시품(詩品), 서품(書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흔히 서예와는 한 뿌리라고 말하는 그림에 관련된 품평인 화품(畵品)이 등장했다. 요즘은 빛이 바랬을 뿐 아니라 대개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스타일을 구긴 인상이지만 이른바 미술 비평의 선조가 바로 이 화품인 셈이다.
미술품격에도 차등이
화품이란 게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마치 오늘날 미술계가 그런 것처럼 수도 없는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화론의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품평은 몇 백에 천을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맨처음 이 방면에 글을 쓴 사람은 사혁이다. 그는 6세기 무렵의 사람으로 그림 평을 하면서 여섯개 항목에 이르는 아주 엄격하고 탁월한 기준을 만들어 대대로 유명하게 됐다. 그가 내세운 첫번째 기준은 다름아닌 기운생동(氣韻生動)이었다. 그림이란 펄펄 살아 있는 것같이 그려야 한다는 것인데 이 기준 이후 1천5백년 동안이나 동양그림을 들었다놓았다한 금과옥조가 됐다.
하지만 사혁은 여기까지였는데 당나라때 주경현은 품평 시도에서 신(神), 묘(妙), 능(能)이란 근사한 말을 찾아냈다. 신품, 묘품, 능품인데 입신의 경지라는 말도 캐들어가면 그 잔뿌리 하나쯤은 여기에 걸치게 된다. 그런데 시대가 좀더 내려오자 신(神)도 묘(妙)도 능(能)도 아닌 그림이 있다는 설이 제기됐다. 송나라때 사람 황휴복은 유비와 제갈량의 나라인 촉지방 화가들의 그림에는 정통은 아니지만 귀신도 탄복할 솜씨가 있는 것을 보고 신묘능 이외에 별도란 의미로 일(逸)이란 말을 만들어 일격(逸格)이라고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길어져버렸다. 아무튼 이번 가을 한국미술 애호가들은 톡톡히 안복(安福)을 누렸다. 간송미술관은 봄가을 40년 연속의 80번째 전시로 ‘풍속인물화전(10.16 - 30)’을 소개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작년에 이어 야심이 담긴 ‘초상화의 비밀(9.27 - 11.6)’을 열었다. 그리고 리움미술관은 컬럼부스 달걀처럼 누구나 다 아는 화원을 가지고 깜짝할 ‘조선화원대전(10.13 - 2012.1.29)’을 열었다.
적어도 품평에 일가견을 있거나 혹은 그것을 쌓고자 하는 독실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세 전시는 모두 섭렵했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밤이 더욱 깊어갈 터인데 마음맞는 이와 품평을 해볼 시간이다. 우선 간송미술관의 것을 일격(逸格) 전시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초상화 전시와 화원 전시에 어떤 품평어(品評語)를 달아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