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음력 7월15일.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이 환갑을 맞은 날이다. 이때 그는 훗낡 한국 미술사연구의 큰 업적이 되는 한국 역대서화가 사전인 『근역서화징』을 이미 탈고한 채 작은 수정을 하면서 인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1928년 간행)
잘 알려진 일로, 이인삼각으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일제하에서 미술품 수집을 통해 민족문화 보존이라는 대임을 떠맡았던 간송 전형필(澗松全鎣弼 1906-1962)과의 만남과 조언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때였다. 그럼에도 삼일운동으로 인한 옥고를 치루고 난 이후 한국의 첫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해 서화인으로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도영 <무량수불> 1924년 종이에 수묵담채 20.5x32.5cm 추정가 500만~1000만원
이때 환갑을 맞아 제자뻘 되는 이도영(李道榮 1884-1933)과 족질(族姪)의 오일영으로부터 축하 그림을 받은 것이 이 그림이다. 이도영과 오일영(吳一英 1890-1960)은 나이 차이는 많지 않아도 사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도영이 한국 최초의 사설 미술아케데미였던 경성서화미술원에서 지도를 맡았을 때 1기생으로 들어와 졸업한 화가가 오일영이다.
이도영은 안중식,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주변의 오세창과도 교류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더욱이 오일영은 오세창 큰집의 조카이다. 이도영의 그림 <무량수불(無量壽佛)>은 소나무 아래에 책을 보는 달마의 모습을 그렸다. 서탁 위의 향로에는 한 줄기 맑은 향연(香煙)이 피워 오르고 있어 위창의 고고한 인품을 상징하는 듯하다.
오일영 <천보구여> 1924년 종이에 수묵담채 21x32.5cm 추정가 600만~1200만원
조카 오일영은 더욱 공손한 마음을 담아 <천보구여(天保九如)>를 그렸다. 천보구여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산(산)과 같이 언덕(阜)같이 등성이(岡)같이 큰 언덕(陵)같이 흘러내리는 시냇물(川)같이 늘 비추는 달(月)과 같이 해(日)가 떠오르는 것같이 오래된 남산(南山)같이 무성한 송백(松柏)같이 신하가 임금을 축수한 것이다. 해와 같고 산과 같고 내와 같다는 내용으로 인해 이후에 축수용 소재로 자주 쓰였다. 그림 속에서는 해와 달이 동시에 그려져 있는게 보통이다. 두 그림 모두 조심스럽고 단정한 필치에서 이들의 위대한 서화인 위창에 대한 존경과 숭모의 마음을 읽게 한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