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에게 조선을 대표할 위대한 학자로 손꼽히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 지식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40대와 50대의 18년을 유배지 강진에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백과사전적 다수의 저술을 편찬하지만 가족에게는 엄청난 기다림과 고통의 기간이 아닐 수 없었다.
유배생활 10년째에 접어든 1810년 가을 고향집의 부인 보내온 헌 치마폭을 재단해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린 것이 《하피첩(霞帔帖)》이다. 하피란 혼례때 ‘신부가 입는 예복이란 뜻.
재단한 치마폭으로 서첩 3권을 만들었고 남은 것은 삼년 뒤에 시집가는 딸을 위해 그림(매조도, 고려대 소장)을 그려 주었다. 하피첩의 글은 집안에서 경계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내용들로 세 서첩은 두 아들과 손자에게 준 것으로 여겨진다.
No.28 정약용 《하피첩》 제1,2첩 24.6x15.6cm 제3첩 24x14.2cm 추정가 3억5천만-5억5천만원
하피첩 서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余在耽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 蓋其嫁時之纁袡 紅已浣而黃 亦淡政中書本. 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戒語 以遺二子. 庶幾異日覽書興懷 挹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名之曰霞帔帖 是乃紅裙之轉隱也. 嘉慶庚午首秋 書于茶山東庵 籜翁.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중에 병든 아내가 헌 치마 5폭을 보내왔는데 대개 그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훈염(활옷)으로 붉은 색이 이미 씻겨나가 황색이 돼 서본(書本)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그래서 마름질을 해 작은 첩을 만들어 손가는 대로 훈계의 말을 적어 두 아들에게 남긴다. 바라건대 훗날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자취와 손때를 생각한다면 뭉클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름 지어 하피첩이라 하니 이는 붉은 치마가 전용된 말이다. 가경 경오년(1810년) 초가을에 다산 동암에서 탁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