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관련되어 서로 반대쪽에 있던 두 사람의 묵란이 12월의 고미술 경매시장에 나란히 등장해 각각 좋은 가격에 낙찰됐다.
첫 번째 작품은 서광범의 석란.
제21회 칸옥션 미술품경매(12/17) Lot. 041
위산緯山 서광범徐光範(1859-1897) <석란石蘭> 비단에 먹, 122.2x39.5cm
추정가 500만~1,200만 원0,000-12,000,000
낙찰가 950만 원
서광범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친정아버지의 7대손으로 증조부는 영의정, 조부는 예조판서,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노론 집안의 양반이다. 박규수에게서 공부하면서 오경석 등 개화론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후에 후에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하는 데 참여했던 지식인이다. 1882년 김옥균의 일본 시찰에 수행했고, 1883년 최초의 보빙사로 파견된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1년간 미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를 순방할 기회가 있었다. 해외 문물을 접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던 그는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갑오개혁 때 귀국해 법무대신, 학무대신 등을 역임하다 미국 전권공사로 발령받아 미국에 가 있을 때 친러정부가 세워지면서 해임, 미국에서 어렵게 망명생활을 하다가 병사했다.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이 석란도는 일본인에게 선물했던 것으로 그림과 글씨에서 그의 능숙한 필치가 느껴진다.
제21회 칸옥션 미술품경매(12/17) Lot. 044
금리錦里 장은규張殷奎(?-?) <묵란도첩墨蘭圖帖> 종이에 먹, 각 26.7x33.7cm
추정가 200만~400만 원
낙찰가 620만 원
김옥균은 여러 차례 민 씨 집안의 암살시도에 쫓겨다녔는데, 가장 먼저 일본에 파견됐던 첫 자객이 바로 장은규다. 의친왕의 생모인 귀인 장씨의 오빠로 1885년 민응식이 김옥균 암살을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일본에 건너가 장갑복 이라는 가명을 쓰며 김옥균에게 접근했지만 실패했고, 이후에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베에 정착하여 여관을 운영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 화첩은 현재까지 발견된 장은규의 유일한 서화 자료로, 그가 그린 묵란도 11점이 들어있다. 난초와 화제 글씨에서 추사 김정희와 석파 이하응의 영향을 느낄 수 있으며 이 작품에 찍혀 있는 인장을 통해 그가 '금리錦里' 라는 호를 썼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