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청자 편년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강진 용운리 9호요와 10호요를 시작으로 서리요, 용계리요, 원산리요, 방산대요, 중암리요, 진산리 17호요 등에서 정밀한 발굴조사가 이어졌고 21세기 들어서는 삼흥리요와 도통리요, 풍길리요, 용운리63호요, 신덕리요 등이 조사돼 초기청자시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다.
그외 국립중앙박물관의 사당리요와 유천리 12호요의 출토품 보고서를 비롯해 이홍근 선생이 기증한 부안 유천리 12호의 수집 유물과 출처가 같은 이화여자대학교 소장품 도록과 해강도자미술관의 강진요 정밀조사 보고서 등 다수의 조사보고서가 공개돼 청자연구의 시각이 보다 확대됐다.
청자 상감 파초 두꺼비무늬 매병, 고려 12세기, 부안 유천리 12호 가마, 동원 이홍근 기증
더구나 21세기 들어 서해의 침몰선에서 인양한 막대한 양의 청자와 함께 출항 시점을 통해 특정 시대의 제작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도 밝혀져 시공을 넘어서는 다차원적 연구가 가능하게 된 시점에 와 있기도 하다.
2005년에 조선관요 박물관에서 개최한 ‘청자의 색・형’ 특별전에 출품된 당(唐) 후기부터 오대, 북송시대 가마의 출토품과, 2015년 강진 사당리 요지보고서를 통해 처음 공개된 두 마리 매미를 음각한 쌍선문(雙蟬文)과 같은 몇몇 표식적 문양을 보면 강진요는 월주요 청자의 태평무인(978년) 양식을 전격 수용한 뒤 그와 같은 진취적 입장에서 한반도 유일의 중심 가마로 발전해간 것을 알 수 있다.
<陰刻雙蟬文楪匙片> 북송초기, 太平戊寅(978년), 월주요, 자계시박물관 소장
이어 제천 송계리 사자빈신사지 석탑(1022) 청자요에서 발견한 청자 등이 검토를 통해 제1기 초기청자시대와 제2기의 분기는 원산리 가마의 순화 3년(992)명, 순화 4년(993)명 청자를 기준으로 11세기 초에 나뉘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기와 3기는 비색청자, 상감청자가 완성된 절정기로 두 시기는 정확히 구분하기 힘들지만 인종 장릉(1146) 출토의 순청자와 문공유 묘 출토의 상감 청자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기는 12세기 전기까지 제3기는 12세기 후기부터로 볼 수 있다.
<상감모란당초문완象嵌牡丹唐草文盌> 고려시대, 文公裕墓(1159년歿) H. 6.2, M. 16.8cm 국립중앙박물관
제2기까지는 이른바 귀족과 문신 정서를 중심으로 한 비교적 안정된 사회였으나 제3기는 무신의 난과 무신정권의 등장, 몽고의 침입 등 대몽항쟁기를 거치고 원의 간섭기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겪었던 기간에 해당한다.
그 외에 편년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정확한 하한을 알 수 있는 태안 대섬 유물(1131년 이전), 마도 1호선(1208년 이전), 마도 2호선(1218년 이전) 등의 유물은 기존 자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 중에는 원대 후기의 문양으로 기존에 13세기 말 고려에 나타났다고 알려진 연당초문이 늦어도 13세기 전기에 이미 다른 양인각 문양과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도 들어 있다.
또 전남 무안 도포리 해역에서는 간지명 상감청자의 문양 패턴을 이어받은 지정11년(1351년)명 대접과 유사한 계통의 상감청자 6백여 점이 발굴됐는데 그 가운데는 이제까지의 자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형도 보여 앞으로 더욱 세심한 연구가 필요하기도 하다.
<상감‘지정11년’명대접象嵌‘至正11年’銘大楪>고려시대 후기, 1351년,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청자를 고려의 상감청자와 구분하기 위해 새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의 기법을 계승하고 있어 지금까지 상감청자와 분청사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필자는 명칭이 다른 만큼 새로운 분류기준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1417년에 공납용 자기의 수급을 통제하기 위한 내려진 조치인 각각사호(各刻司號)를 분류기준으로 제안했다.
초기청자시대를 지나 중국의 태평무인 양식을 수용하면서 최고의 수준에 오른 강진요는 고려 핵심세력의 후원을 받으며 중국 남북의 여러 가마의 장점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고려의 조형적 전통에 맞게 조화시키면서 귀족사회의 정서에 어울리는 제작 방향을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음양각에 비해 열배 이상의 고난도 기술을 필요로 하는 상감기법을 선택한 당사자는 고려 귀족이었다. 그들은 흑백 상감으로 새긴 문양이 음영으로 표현되는 음양각보다 문양 효과가 높을 뿐 아니라 색상에 따라 문양 고유의 성격까지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관심을 보인 것으로 여겨진다.
우아하며 단정한 입체 조형에 그친 순청자는 흑백 상감의 등장으로 평면화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흑백의 강한 시각적 효과가 상승세를 타는 한편 단아한 양감의 입체성이 점차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양상은 상감의 점유율이 높아질수록 반비례하여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입체적 미감의 순청자가 평면적 미감의 상감청자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상감청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2세기 중기는 한중 관계가 소원한 시기라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초 중국의 동향에 민감했던 고려의 청자는 상감기법 개발 이후 중국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북송과 남송의 관요 청자는 소문(素文)과 불투명유로 추상적이며 신중하며 철학적인 유현(幽顯)의 세계를 추구한 반면 고려는 투명유로 사실적이며 명랑한 현실 세계의 아름다움을 흑백의 상감선(線)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