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 구분
도리포 해역에서 인양된 청자나 <정릉(正陵)명 청자>(그림1)는 간지명 청자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작 수준이 하락한 상태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품질 저하는 곧 상감청자의 질적 쇠퇴를 가리키는데 반면 거기에는 이 시기에 상감청자의 보편화와 함께 다량생산이라는 사회적, 시대적 요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는 강진 가마의 청자 양식이 전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분청사기라는 새로운 이름의 또 다른 상감청자가 사회 일반에 폭넓게 자리 잡는 사실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림1. <象嵌‘乙酉司醞署‘銘梅甁>, 고려시대후기, 1345년, H. 30.3cm, 국립중앙박물관
강진 가마에서 청자 제작에 있어 변곡점이 될 만한 유물은 <정릉명 대접>에 앞서 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강진 사당리10호 요지에서 출토된 청자들이다. 1991년 해강도자미술관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여기에서 출토된 청자에는 구양식의 상감청자가 단순화되고 거칠어지는 한편 새로운 양식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매병의 어깨 부위에 새겨진 변형된 연판문, 새로운 감각의 파도문과 이색적인 인화문 그리고 전에 없던 전접시 같은 형태는 <정릉명 청자>의 연당초문 계통의 소략한 문양이 이 시기에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자료들이다.*
아마 사당리 10호에서 보이는 신구 양식의 청자는 강진 청자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말해주며 이러한 상태는 15세기 초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여겨진다.
2) 강진 가마의 확산과 분청사기
강진 사당리10호 요지 출토품은 분청사기에서 보는 새로운 조형이 등장하는 단계에서 강진 가마의 활동이 멈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이러한 조질 청자는 전국적으로 확대 생산되었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 15세기 초기의 제작이라 여겨지는 마지막 단계의 강진가마 방식의 청자는 본격적인 인화문 분청의 등장을 말해주는 합천 장대리 요지 출토품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즉 이곳에서 상감청자의 마지막 단계인 <사선(司膳)명 상감청자>(그림2)와 인화문 분청의 본격적 등장을 말해주는 <경승부(敬承府)명 인화문 분청>(그림3)이 나란히 출토됐다.
그림3. 경승부(敬承府)명 인화문 분청
<사선명 상감청자>는 간지명 상감청자의 안 바닥에 글자를 새겨 넣는 관행에 따라 흑색 상감으로 ‘사선’ 두 글자를 같은 위치에 새겼다. 물론 인화문도 단순하고 소략하게 찍었고 바깥면에는 당초문처럼 보이는 선(線) 상감을 성글게 새겼다. 출토품 중 일부의 유태는 다른 고려식 사선명 청자에 비해 밝은 회청색으로 깨끗하고 또 형태도 단정하며 점토 비짐으로 좋은 상태로 구운 완(碗)도 나왔다. (그림2)
그림2. 사선(司膳)명 상감청자
그런데 이 완과 동일한 재질의 인화문 분청에는 기존에 문양 구성의 관행을 무색케 하는 고밀도의 인화문이 새겨져 있고 또 그릇의 바깥면에 ‘경승부’라는 관사 이름을 새긴 그릇이 공존하고 있다.
조선은 태종17년(1417) 4월부터 공납하는 사목기(砂木器)의 수급을 통제하기 위해 그릇에 해당 관사의 이름을 각각 새겨 넣는 각각사호(各刻司號) 조치를 시행하였다. 여러 관사 가운데 특히 경승부는 1404년 6월부터 1418년 6월까지 존속한 관사로 1417년 4월의 각각사호 조치 이후 ‘경승부’라는 명칭을 새길 수 있는 기간은 불과 1년 남짓했기 때문에 ‘경승부’명 자기의 출현을 기점으로 고려의 상감청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본격적인 인화문 분청사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부터 경상도와 충청도의 일부 공납용 그릇에 경승부명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문양을 한 인화문 분청이 동시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장대리가마 출토의 <사선명 상감청자>와 <경승부명 인화문 분청>은 상감청자와 분청사기 사이에 한 획을 긋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주]
*『강진(康津)의 청자요지(靑磁窯址)』(해강도자미술관, 1992년)의 사당리10호요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