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지명(干支銘) 상감청자
몽고의 7차 침략과 대몽항쟁 40여 년 간 고려의 피해는 임진왜란 못지않게 상당히 컸다. 뒤이어 여ㆍ몽 강화조약과 개경 환도(1270)가 단행되었으나 이후 공민왕 5년(1356)까지 지속된 원의 내정간섭과 과중한 경제적 징구로 고려의 재정은 고갈되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기간인 제4기에 한국청자의 흐름을 바꾼 간지명(干支銘)을 새긴 상감청자가 등장하게 된다.
간지명 상감청자는 상감기법을 사용해 그릇 바닥에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간지를 새긴 청자를 말한다. 14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이들 간지명 상감청자는 제작 의도 면에서 보면 음식 용기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해 고려 정부가 전적으로 주도한 기획 생산일 가능성이 높다.
<청자 상감 유로수금문 '기사'명 발(靑磁象嵌柳蘆水禽文‘己巳’銘鉢)>
고려시대 후기, 1269년, H 8.3, M 19.1cm, 국립중앙박물관
그 이유는 갑번으로 빗은 상품(上品)의 음식용기로 기종과 문양 소재를 통일한 사실 이외에 음・양각에 비해 열배 이상 공력이 드는 상감기법을 사용해 ‘기사’년부터 ‘을미’년까지 26년간 일정한 형식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강하고 지속적인 정책 수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간지에 대한 편년 연구가 1269∼1295년과 1329∼1355년으로 양분되어 있어* 음・양각 위주로 일부 상감을 쓰던 13세기 전기의 청자에서 전면 상감의 간지명 상감청자로 전환된 시점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 기간 청자 전반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간지명 상감청자의 편년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 고려시대 후기 13, 14세기의 청자 연구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된다.(계속)
-------
*간지명 상감청자의 편년문제와 관련해 처음 나오는 간지인 기사(己巳)년을 1269년으로 볼 것이나 아니면 60년 후인 1329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두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간지명 상감청자(干支銘象嵌靑磁)』(해강도자미술관, 1991)를 참조, 최건,「간지명 청자의 제작시기와 제작 가마」,『고려청자(高麗靑磁), 강진(康津)으로 귀향(歸鄕)』(강진청자자료박물관, 2000), pp.8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