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진요의 등장과 월주요의 ‘태평무인’ 양식
강진요가 정체되어 있던 초기청자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된 경위는 앞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강진요가 고려 왕실의 선택과 지원을 받은 시점이 본격적인 발전 이전인지 아니면 그 이후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문제는 당시 소멸한 여타 가마들과 강진요의 차이를 보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해 진다. 여타 가마들에서 구운 청자는 대부분 소문(素文)으로 조형 발전은 물론 재질과 조형의 개선노력 없이 정체되어 있었다. 월주요 청자의 절정기 양식으로 평가하는 소위 ‘태평무인(太平戊寅, 978년)’ 양식도 나타나지 않는다.1) 아마 이 가마들은 새로운 양식이 도입되기 이전에 폐요 되었거나 아니면 중심축에서 밀려나 영향력 없는 주변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월주요의『사롱구 월요지(寺龍口越窯址)』발굴보고서에는 북송 초기(960-1022)의 대표 문양으로 쌍선문(雙蟬文), 쌍봉문(雙鳳文), 쌍앵무문(雙鸚鵡文), 구하문(龜荷文) 등을 꼽는다.2) 이 문양들은 강진요의 그것과 동일한 곳에서 만들었다고 할 만큼 유사해 특별한 관심을 끈다.
예컨대, 강진요에서 출토된, 두 마리 매미가 날개를 펴고 마주 보는 형상의 쌍선문(그림 2-3)은 자계시 박물관의 <태평무인명 쌍선문 시편(太平戊寅銘雙蟬文楪匙片, 978년)>(그림 2-1)의 표현방식과 매우 유사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쌍선문은 북송 중기(1023-1077)가 되면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문양이다.
<陰刻雙蟬文楪匙片> 북송초기, 太平戊寅(978년), 월주요, 자계시박물관 소장
『靑磁의色・形-韓中靑磁比較展』(조선관요박물관, 2005), 도297.
<雙蟬文楪匙 실측도> 북송초기(960-1022년), H. 4.0, M. 16.0, B. 8.8cm
『寺龍口越窯址』(文物出版社, 2002), p.84의 도 51-1.
<陰刻雙蟬文楪匙 片> 고려시대 전기 11세기, 너비 7.0cm, 강진군 사당리23호요지 출토
『강진사당리고려청자』(청자박물관, 2016), p.042의 도029.
강진요의 쌍봉문도 월주요의 그것을 모델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연잎 가운데 거북이를 새긴 보기 드문 문양인 구하문도 강진요 용운리10호-2층에서 출토된 파도 속 거북이를 새긴 구파문(龜波文)을 연상시키는 문양이다.
북송초기 월주요청자에 보이는 특정문양 몇 가지가 100년이 지난 12세기의 강진요에서 같은 모습으로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추측컨대, 태평무인년, 즉 978년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 한반도 남단의 강진요에서 동일한 접시에 동일한 음각기법으로 동일한 쌍선문을 새겼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된다.
2) 주변 가마의 환조 연판문과 상감, 철화기법
강진요가 중심이 되어 고려의 귀족사회가 추구하는 우아하고 섬세한 갑번(匣燔) 상품의 청자를 제작하는 한편, 11세기경에 새로 시작된 주변 가마들은 강진요의 환조연판문(丸彫蓮瓣文)을 표식으로 하면서 해남 진산리, 함평 양재리, 영광 오동리, 인천 경서동을 향해 북상한다.3)
또 진산리요 청자를 싣고 동쪽으로 향하다 침몰한 완도선 청자의 철화기법은 부산 진인동 가마와 중부 내륙지방을 거쳐 충북 제천의 사자빈신사지 석탑 청자가마에 이르게 되었다. 아마도 강진요에서 분화된 새로운 주변 가마들이 중서부지방에 분포했던 전축요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중하품 수요에 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조연판문 그리고 단순한 음각의 거치문과 당초문은 2003년 8,734점이 인양된 군산 십이동파도 해역의 청자 유물들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음각문양은 경기도박물관에 있는 <상감거치문 광구병>(그림 3-1)에 흑상감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숙한 상감과 환조 연판문이 기술수준이 다소 불완전한 주변 가마에 정착되고 있었던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象嵌鋸齒文廣口甁> 고려시대 중기, 11세기, H. 27.4cm, 경기도박물관
초기청자 시대에 용인 서리의 상반 가마와 방산대 가마에서 시작된 상감과 철화기법은 이들 가마가 쇠퇴하면서 남서해안 지방의 고급품제조의 주변 가마인 진산리, 양재리로 이동하면서 강진요의 환조연판문과 결합해 이들 가마로 전전하게 된 상황은 매우 예외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갑번 강진요가 최상급 수준의 소문, 음・양각 등 순청자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과 분명한 차별을 보이고 있다. 고려 귀족사회의 미적 정서가 윤곽이 또렷하고 강렬하며 억센 감성의 것보다 우아하고 정적이며 고밀도의 순청자를 지향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갑번의 강진요가 북송 초기(960-1022) ‘태평무인’ 양식의 수용자였음을 확인시켜주는 청자요가 충북 제천 한계리에 있는 사자빈신사지 석탑 경내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탑은 기존에 있던 가마터를 없애고 그 자리에 1022년 축조됐다.4)
여기서 음각 화당초문과 흑갈색의 철화문양이 확인돼 강진요에서 수용한 북송초기 양식과 동시대의 해남 진산리 가마의 철화 기법이 강진요의 전국확산 경로를 타고 중부내륙 깊이 충북 한계리까지 전파되었고 또 그와 같은 가마가 1022년까지 일정기간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자빈신사지 석탑 가마터와 그곳에서 나온 유물은 ‘태평무인’ 양식을 전격 수용한 강진요가 한반도 청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던 당시의 정황을 입증해주는 자료이다.
[주]
1) 고창 용계리 요지에서 북송조기 양식으로 추정되는 소박한 솜씨의 음각 문양이 있지만 좀 더 발전된 양상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2)『사룡구 월요지(寺龍口越窯址)』(북경문물출판사, 2002), p. 366-367의 도179, ‘각기 자기전형 문양도(各期瓷器典型紋樣圖)’ 참조
3) 정양모「고려청자」,『고려청자명품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 1989), p. 271.
4) 최건,「New Developments in the Study of Koryo Celadons」,『Transaction of the ORIENTAL CERAMIC SOCIETY』Volume66. (The Oriental Ceramic Society. England, 2001-2002), ―, 「초기청자 편년문제 재론」, 『미술사학연구(美術史學硏究)』250・251 (한국미술사학회, 2006), pp. 14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