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월주요 청자의 수용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청자를 제작한 때를 말해주는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한반도 중부 이남의 여러 지역에서 당시의 중국 청자를 대표하는 월주요(越州窯) 기술이 전해져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던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고도의 수준 높은 기술은 종래와 같은 소극적 교류만으로 불가능하다.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청자를 자체 생산하려는 요구가 컸기 때문에 월주요의 전문인력이 건너오고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강남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월주요식 청자를 한반도에서 다시 만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월주요의 새로운 기술은 시간적, 공간적 여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됐다. 남서해안 지방에는 흙으로 쌓은 소형 토축요(土築窯) 계열의 가마들이 들어섰다. 또 중서부 지방은 벽돌을 쌓아만든 대형의 가마인 전축요(塼築窯)가 자리 잡아 크게 양분된 양상을 보인다.**
두 계열의 가마는 가마를 쌓는 방식과 규모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두 지역에서 제작한 청자는 만당 시대(9세기 중반-1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옥벽저(玉璧底) 양식의 완(그림 1-1)과 광폭의 윤형저(輪形底, 달리 옥환전(玉環底)라고도 한다. 소위 선(先)해무리굽이다) 형식으로 굽을 깎은 일상 용기들로서 대체로 월주요 방식을 대체로 따르고 있다.
<素文玉璧底盌>, 고려시대전기, 9세기후기
H. 5.0, M. 15.7, B. 6.7/1.4cm, 해강도자미술관 소장
단지 토축요에서는 전축요와 달리 중국적인 조형 감각과 함께 한국적인 요소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토축요와 전축요의 공존 관계는 10세기 말에서 1세기 초까지 유지된다. 대형 전축요 계열의 대표적인 가마의 하나가 황해도 원산리 가마이다. 이곳에서는 <순화 3년(淳化三年 992) 명 청자>와 <순화 4년(993)명 청자>가 출토됐다. 이들 청자는 이 가마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원산리 가마와 유사한 대부분의 전축요 계열의 가마들이 토축요 계열의 가마들도 비슷한 과정을 쇠퇴 또는 소멸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2) 강진요의 발전
10세기말에서 11세기 초까지 한반도 중부 이남의 18개 지역에 넓게 분포해 있던 1백 수십개소의 가마는 그후 뚜렷한 발전이 없이 정체를 보이면서 영향력 없는 지방 가마로 전락했다.
그러나 한반도 최남단 전라남도 강진요는 여타 가마들이 실현하지 못한 품질 향상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먼저 만당 양식의 월주요 청자에 보이는 얇은 실투성 유약을 맑고 투명한 상태로 끌어올렸다. 또 중국과 달리 초벌구이 방식을 채택해 유약층을 상대적으로 두껍게 조작함으로서 투명도는 물론 표면의 부드럽고 생생한 질감을 보장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무늬가 없는 소문(素文)이 원칙이었던 옥벽저 계통의 완을 계승하면서도 한국형 일훈저 완(日暈底盌)의 안쪽에는 가는 선이나 깊은 음각으로 새긴 화당초문(그림 1-2, 3)을 새기는 등 이전에 없던 음각과 압인(押印) 문양을 시도했다. 이러한 문양은 투명한 유약 밑에서 한층 선명하게 보여 높은 장식 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효과가 강진요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白磁陰刻花唐草文盌>, 고려시대전기, 10-11세기
H. 6.0, M. 15.2, B. 4.6/0.8cm , 개인소장
<陰刻花唐草文盌>, 보물1037호, 고려시대전기, 10-11세기
H. 5.9, M. 17.5, B.4.8/1.2cm, 삼성미술관
그런데 초기청자 시대의 후반에 강진요가 보인 발전을 생산품의 품질 제고에만 두는 것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강진요의 태토와 원료 그리고 기술력이 남달리 뛰어났다면 이를 수도인 개경 인근으로 옮기는 편이 생산과 유통 면에서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과 지근거리인 경기도 광주에 왕실의 백자요가 집중되었던 것도 효과적인 생산과 관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판단이 가능하다.
강진을 청자제작 거점으로 결정한 데에는 외적 요인이 신중하게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개경 인근의 원산리요는 태묘(太廟)의 향기(享器)를 2년간 제작하는 특수 임무가 맡겨져 있었고 황해도, 경기도 일대에는 거대한 규모의 전축요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을 제쳐놓고 규모가 가장 작을 뿐 아니라 거리도 멀고 또한 해상운송에 따른 어려움과 손실을 예상하면서까지 소형 토축요 중심의 강진요를 선택한 것은 바로 고려 왕실이었다. 왕실의 선택 기준은 기술, 품질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고려왕실의 강진 선택은 한국 청자의 미래를 예견한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약 반대로 고려 왕실이 월주요와 같은 중국 청자를 만드는 전축요 방식의 가마를 택했다면 ‘천하제일 고려비색’은 물론 그 이후에 상감청자와 분청사기 같은 도자기는 존재조차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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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자의 발생시기에 관한 논의는 (1)통일신라시대 후기인 9세기 발생설 (2)고려 초기인 10세기 발생설의 두 견해가 있다. 논의 초점은 ‘옥벽저 계통의 완’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이는 중국측의 분석과 해석 그리고 국내 자료의 이해과정에서 생긴 차이로 1세기 정도의 편차를 보인다. 최건, 「초기청자 편년문제 재론(初期靑磁 編年問題 再論)」,「미술사학연구(美術史學硏究)」250・251 (한국미술사학회, 2006), pp. 12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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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축요(土築窯)의 기본적인 구조는 월주요식이지만 전통방식을 조합해 내화토를 사용해 10m 크기로 쌓았다. 전축요(塼築窯)는 월주요와 유사한 내화 벽돌을 써서 40m 길이의 대형 가마를 만드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두 가마의 1회 생산량은 규모만큼 큰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