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는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자기를 만든 고려를 대표하는 도자기이다. 그 솜씨와 기술은 맥맥이 전해져 조선백자 탄생의 바탕이 됐다. 한국 도자문화의 뿌리와도 같은 청자의 세계를 그 조형적 특징에서 시대적인 발전 양상까지 前 조선관요박물관의 최건 관장의 글을 통해 알기 쉽게 소개한다.*
들어가며
한국 청자의 역사에서 전남 강진요(康津窯)를 빼놓고 말하는 것은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통일신라시대 후기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600여 년에 이르는 청자의 긴 역사에서 초기 단계인 발생과 발전 시기의 약 150년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 기간에서 강진요가 한국 청자의 적자(嫡子)로서 절대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인 9세기 중반 즈음에 중국 월주요(越州窯)를 모델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청자는 11세기의 세련기를 거치면서 한국적 요소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2세기 전반에는 종주국인 중국을 제치고 ‘고려비색 천하제일(高麗翡色 天下第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중국 안의)다른 곳에서도 만들고자 했으나 종래 이르지 못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국 상류사회 역시 고려청자에 깊이 매료됐다.
이러한 최상품 청자는 대부분 강진요에서 제작됐다. 강진요에서 만들어진 청자가 중국 청자와 구별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월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 조형요소로서 맑고 투명한 유약과 그리고 일품(逸品) 제작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자 음각 연당초문 정병> 고려시대, 높이 36.7cm 네즈미술관
<청자 음각봉황문 주자> 오대-북송초기 월주요, 높이 18.5cm,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월주요의 청자 유약은 올리브-녹색을 띠는 반실투유(半失透釉)이다. 이는 유층(釉層)이 완전히 투명하지 않아 질감이 단단하다는 느낌이다. 반면 강진요에서는 이런 중국식의 어두운 유약을 맑고 투명한 것으로 바꾸고 유층도 상대적으로 두껍게 했다. 그래서 투명한 유층을 통한 빛의 난반사로 태토 표면의 질감이 부드러우면서 선명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또 가는 음각이나 부조 그리고 삼차원의 소조를 동적 감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다든지 흑백상감 같이 여러 색을 써서 문양을 선명하게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맑고 투명한 유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효과였다.
일품식 제작은 ‘고려비색 천하제일’의 핵심 요건이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도범(陶范)과 같은 모양 틀을 쓰고 또 문양을 도식화한 이른바 조직적인 생산체제를 통해 청자를 만들었다. 이런 제작방식은 효율적이기는 해도 재료와 조형이 갖는 고유의 미적 가치가 감소된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일품식 제작을 기본 원칙으로 삼은 고려는 기계적인 판박이 문양을 지양하고 수공(手工)으로 입체의 생동감을 높인 결과 자연스러운 묘사를 통해 동적 요소가 훨씬 강조된 표현 효과를 얻게 됐다. 고려청자에서 흑백상감 문양을 선호하게 된 것도 구별이 쉽지 않은 단색조의 음양각보다 다색(多色)의 상감기법을 써서 회화적 감성을 더욱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인다.
투명한 유약, 일품 제작체제, 입체에서 평면으로의 관심 이동은 고려청자가 갖는 조형정신의 핵심이다. 고려에서 시작돼 조선까지 이어진 청자 6백년의 역사를 생성과 성행, 변화를 기준으로 보면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제1기 초기청자 시대, 9세기 후기~11세기 초기, 전국 각지에 토축요(土築窯), 전축요( 塼築窯) 분포
제2기 입체조형 시대(순청자), 11세기 전기~12세기 전기, 중심-강진요, 주변-진산리요 등
제3기 평면조형 시대(상감청자), 12세기 후기~13세기 전기, 중심-강진요 부안요, 주변-전국 일부
제4기 기획생산 시대, 13세기 후기~14세기 전기, 중심-강진요, 주변-전국 일부
제5기 다량확산 시대, 14세기 후기~15세기 초기, 강진요에서 전국 지역로 폭 넓게 확산
제1기는 중국의 모방에서 시작해 재질과 기술 향상을 위한 발전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와 제3기는 강진요와 부안요를 중심으로 한 일품주의가 정착한 창조의 시대로 고려 귀족사회의 정서가 청자의 조형정신을 주도하면서 절예품 생산에 주력했던 시기이다. 반면 제4기와 제5기는 기존의 경험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원래 조형정신이나 정신적 가치를 구현하기보다 실용주의를 내세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청자를 계승한 15세기의 새로운 도자를 가리켜 20세기 들어 분청사기라는 명칭을 새롭게 부여함으로서 한국도자사는 청자→분청→백자의 구도로 정착됐다. 필자는 분청의 개념과 명칭이 20세기 전반의 사회적 정서 안에서 규정된 만큼 청자와 분청의 범위도 일정한 기준으로 재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바로 그 시점은 한반도의 주류였던 상감청자가 분청이라는 이름을 붙인 새로운 감각의 도자에 최고의 자리를 넘긴 때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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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8년9월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린 고려청자 1100주년기념 특별전도록 『고려청자의 頂點을 만나다』에 수록한 내용을 재정리한 것이다.
**『袖中錦』 ‘天下第一’條에, “ … 定磁 … 高麗秘色 … 皆爲天下第一也, 他處雖效之 終不及”, 鄭良謨,「高麗陶磁に關する古文獻資料」,『世界陶磁全集』18.高麗(東京: 小學館, 1978), p. 269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