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銅梵鐘 높이 24.5cm
2004년 4월 29일 서울옥션 제86회 미술품경매 No.49 9500만원 낙찰
비교적 작은 범종이지만 형태와 의장 그리고 표현이 섬세하고 매우 탁월하다. 고려의 솜씨 좋은 장인의 수준을 엿보게 할 정도이다.
용뉴부의 구조는 천판위에 용이 휘감긴 음통이 있고 음통 끝에는 작은 보주가 올려져 있다. 음통 자체에는 음각으로 문양을 넣었다. 종을 거는 역할을 하는 용뉴(龍鈕)의 용은 험상궂은 인상과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갈기가 인상적이다. 용은 치켜든 한 쪽 발로 여의주를 움켜쥐고 있다.
종신(鐘身) 위쪽의 천판(天板)에는 연판문을 돌려 윤곽을 잡았다. 그 아래의 상대(上帶)의 문양 띠에는 위 아래로 각각 2줄씩 선을 치고 그 사이에 당초문을 새겼다. 종신에는 사방에 유곽을 만들어 안에 9개의 유두를 조각했다. 유곽 역시 안쪽에 당초문을 새겼다.
종복(鐘腹) 부분에는 비천상 4구가 새겨져 있으며 두 곳에 연판문의 당좌(撞座)를 만들었다. 이들 사이에 음각으로 범종의 주조 내력과 시주자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부식이 있어 전체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렇지만 예술성 높은 조각과 명문의 존재로 인해 자료 가치가 매우 놓은 동종이다. 해독된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奉佛弟子南贍部州高麗國
安興(典?)□書畵圖厓□將同正行
扶輔下校尉金永一大□□
特爲先世父母六親眷
屬□苦得□□成□
士道□入(?)
□武□天長太于(?)二秋國
士大夫百歲豊合一已輔人(?)
田大臣□除(?)□人□□
田□造□□□□集師□
□庚申二月日記
범종은 고찰에서 대대로 잘 보존돼 전해오는 경우도 있지만 절이 폐사 경우에는 뜻밖에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범종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는 다른 골동에 비해 많지 않지만 미술시장에 전하는 얘기를 하나 소개하면 이런 게 있다.
한 40여전 전의 일로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쯤에서 출토된 범종에 관한 일화다. 철원에서 고물상을 하는 사람 중 하나가 청동 탑 하나를 찾은 뒤로 그 일을 업으로 하다시피 했던 사람이 있었다.
당시 철원이나 전곡 등지의 사격장 주변에는 탄피를 주워 모아 고물상에 팔는 장사꾼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보통 고장 난 지뢰탐지기를 개조하여 땅속의 탄피를 찾았다. 이 상인도 지뢰탐지기로 탄피를 찾다가 청동 탑이 나와 뜻밖의 큰돈을 만지면서 그 뒤로는 전국을 누비며 옛 절터를 찾아 돌아다녔다. 말하자면 전문 도굴꾼이 된 것이다.
어느 날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에 있는 산골짜기에 절터가 있는 말을 듣고 이 사람은 일행을 데리고 찾으러갔다. 절터가 있던 자리는 벌써 밭이 돼 있었다. 며칠이고 밭주인이 밭에 나와 일을 하는 바람에 이들은 주인에게 순순히 종을 찾는다고 말하고 만일 종이 나오면 팔아서 같이 나누자고 하고 작업을 개시했다.
그런데 밭 주변을 탐지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에서 신호가 들렸다(소리는 기계를 들고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었다). 순간 욕심이 발동한 그는 주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재빨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척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이리저리 장소를 옮기면서 ‘여기는 아무것도 묻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고는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이들은 다시 돌아왔다. 동네 어귀에 조용히 차를 세우고 밭으로 올라가 낮에 보아놓은 곳을 파면서 한참 종을 찾았다. 그런데 때마침 밭주인이 동네 마실을 다녀오다가 탐지기를 가지고 왔던 사람들의 차가 서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밭으로 몰래 올라가보자 역시나 낮에 왔던 사람들이 밭을 파고 있었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그길로 파출소로 달려가 경찰관을 불러 함께 밭으로 달려갔다. 도굴꾼들은 경찰들이 오는 소리를 듣자 모두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그들이 작업하고 있던 곳을 살펴보자 과연 몇 사람이 들어도 들 수 없을 정도의 큰 범종이 반쯤 모습을 드러내 있었다.
이 종 존재는 곧 도청에 알려졌고 도청에서 사람을 보내 정식으로 발굴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재로 정식 등록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