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器 馬形角杯 12x8x20(h)cm
2017년9월19일 서울옥션 제145회미술품경매 No.185, 9000만원 낙찰
인사동 골동거리에 가면 도자기만큼 자주 볼 수 있는 게 토기이다. 토기는 신라, 가야, 백제 할 것 없이 고루 만들어 썼다. 각 지방의 고분에서 다수가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토기는 그릇형태이다. 제3의 형상을 가진 토기는 사례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형상이 있는 토기는 수집 대상이 되는데 처음부터 많지 않기 때문에 일품이나 걸작을 조우할 기회 역시 드물다. 우당 홍기대 선생은 고미술계에서 제1세대 딜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서나 문집을 보면 문인이나 사대부가 취미생활로 무엇인가를 모은다는 내용은 ‘전혀’에 가깝게 등장하지 않는다.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해서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때문이다. 그런데 골동이란 단어가 18세기후반이 되면 등장한다.
연행 사절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의 골동취향, 골동시장을 견문하면서 조선에서 전해진 것이다. 그래도 당시의 골동수집 대상은 중국 물건이었다.
조선의 도자기는 관심 밖이었다. 청자는 당연히 전세품이 없었고 있다고 해도 무덤에서 나온 출토품인 때문에 조상숭배 정신으로 무장된 유교의 세계에서는 완상(玩賞)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또 백자는 백자대로 생활에 늘 쓰는 기물이므로 수집하고 모을 생각을 하지 않다.
그래서 고미술상 1세대는 일제식민지 이후부터 등장하게 된다. 제1세대 딜러인 우당 선생이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이 이 토기 마형각배이다. 각배는 유라시아 기마민족의 생활에서 유래한 술잔이다. 잔 자체가 뿔처럼 생긴 것이다.
우당 선생은 이를 1960년대에 인사동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손에 넣었다고 했다. 토기 그릇에도 흔히 보이는 받침 위에 사각 대를 올려놓고 그 위에 말을 형상화했다. 각배는 마치 사람이 안장에 올라앉은 듯이 안장위에 올려놓았다.
기마인물형토기(주인상) 높이 26.8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1호
말 형상을 한 토기로는 유명한 국보 91호가 있다. 이는 두 점이 나란히 국보가 된 것으로 화려한 장식을 한 말 위에 한쪽은 주인이, 다른 한쪽은 하인인 듯한 인물이 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우당 선생이 마형각배를 보았을 때만해도 세상에는 말을 빗은 토기는 경주 출토의 이것밖에 없었다. 우당 선생 토기의 말은 물론 국보 말과는 다르다. 우선 안장이 없다. 그리고 국보 토기가 전투용 말처럼 가슴 앞쪽에 창과 같은 장식물을 단 데 비해 이쪽은 방울 치장이 전부이다.
당삼채 장식말, 당
말 가슴에 방울을 단 것은 국내에는 사례가 별로 보이지 않는데 중국에는 있다. 당나라 때의 당삼채 말 가운데 가슴에 커다란 방울장식을 단 것들이 있다. 그 외의 장식은 재갈과 뒤쪽의 밀치끈뿐이다. 안장이 있을 자리에 그냥 끝이 뾰족한 각배가 얹혀 있다.
이 특이한 토기에 대해 무엇을 위해 왜 만들었는가는 국보 기마인물형 토기처럼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뿔잔을 등에 실은 말의 특수한 조형 그 자체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통의 상상을 넘어 고대의 어떤 신비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마인물형토기, 높이 23.2cm 국립경주박물관 국보275호
우당 선생은 이 보물과 조우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브란스 의전(醫專)출신의 의사 이양선 박사가 말형상의 토기를 구입한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이양선 박사 수집품은 80년 후반에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됐는데 그중 말 형상의 기마인물형 토기는 국보 275로 지정됐다. 이는 갑주를 두른 말 위에 기수가 올라가 앉아 있고 그 뒤에 뿔잔 두 개가 또 실려 있는 이상스러운 형상이다.
국보 91호나 이양선박사의 국보에 비하면 우당 선생 컬렉션은 심플한 편이다. 그러나 적절히 안배된 균형감각 위에 세련된 장식과 정교한 묘사로 인해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은 사실이다.
우당 선생의 토기마형각배는 그의 회고록인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에도 수록된 애장 명품 중 하나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