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磁靑華六角香爐 21.8x18.8x14.3(h)cm
2014년9월23일 서울옥션 제133회미술품경매 No.155, 13억5000만원 낙찰
백자에 이화문(梨花文)을 양각으로 장식하고 빈 바탕에 청화를 가득 채워 넣은 향로이다. 이화문은 말할 것도 없이 이씨 왕가의 상징이다. 따라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향로는 19세기 후반 최고의 수준과 솜씨가 집약된 향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올오버페인팅 식의 장식은 원래 조선 고유의 취향이 아니다. 이국적인 정취가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유교적인 조선의 미적 감각은 어딘가 하면 군데군데가 비어있는 여백이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향로가 만들어지기에 앞서 18세기 중후반에는 조선적 감각에 더해 상류층 사이에 중국 취향이 크게 유행했다.
중국 청유도자기가 보이는 책거리(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행 사신들의 영향이기도 한데 많은 중국 문화, 물품이 수입되었고 그 중에는 중국 도자기도 들어 있었다. 그 사례는 앞서도 소개한 책거리 그림에 장식으로 놓인 중국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채색 유약이 개발돼 사용됐다. 그래서 백토로 빗은 자기 위에 채색 유약을 발라 전체가 새빨간 도자기 혹은 샛노란 도자기 또는 전부가 청색인 도자기가 만들어졌다. 그런 도자기 중 일부 역시 조선에도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백자청화 육각병, 높이 14.9cm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조선에서는 채색유약 기법은 없었다. 유약하면 어디까지나 투명유약이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청화를 전체에 바르고 그 위에 투명유약을 씌워 청유(靑釉) 도자기와 같은 분위기를 낸 것이다.
이렇게 청화를 전면에 바른 것을 일본에서는 유리지(瑠璃地)라고 해 문양만 청화로 그린 것과 구분했다. 한국에는 달리 구분해서 부르는 말이 없다. 유리지의 지는 바탕을 가리키고 유리처럼 푸르다는 뜻에서 유리를 썼다. 요즘은 듣기 힘들지만 불과 이십여 년 전만해도 상인들 사이에 일본식으로 ‘루리지’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백자유리지 양각매죽문 각병, 높이 8.4cm
19세기 전반에 되면 이렇게 전체에 청화로 바른 병, 합, 연적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전면청화에 한 번 더 문양을 넣고자 하면서 양각 기법이 동원된 것이다. 백자에 청화로 문양을 그려넣는 것과 정반대로 양각으로 문양을 새겨 놓고 그 자리만 피해 청화를 발랐다. 이렇게 해서 청백의 콘트라스트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흰 바탕에 청화를 넣은 이상으로 화려하면서도 품위있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청화향로는 이화문이 들어간 것처럼 최고의 장식이 동원됐다. 향로 전체를 마치 청동제기를 만들 듯이 유각으로 모를 냈다. 각 면마다 양각기법으로 12송이의 배꽃을 배치했다. 그리고 면과 면이 만나는 부분에도 신경을 써서 상중하에 3송이의 꽃을 배치해 빙 돌아가며 배꽃문양이 연속되도록 연출했다.
그리고 배꽃 사이에 청화를 칠했는데 발색이 깊고 은은하다. 청화는 구연부, 굽 그리고 양쪽에 달리 손잡이 고리와 가락지에는 바르지 않고 여백으로 남겼다. 굽에는 바닥면과 닿는 곳에 작은 턱을 만들었고 그 위쪽으로 여의문처럼 보이는 풍형(風穴)을 뚫어 장식을 추가했다.
19세기 후반에 이토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한 청화백자 향로이고 보면 궁중 내지는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운현궁 대원군 거소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y)